프랑수아 오종이 악동인 이유

영어로 ‘Bad Boy’, 즉 ‘악-동’이라는 두 음절은 프랑수아 오종(Franois Ozon)이라는 이름 앞에 가장 빈번하게 놓여온 단어일 테다. <바다를 보라> 등 중/단편과 <시트콤>으로 시작된 장편영화들에서 그가 걸어온 악취미적 자취를 더듬어볼 때, 충분히 수긍 가는 수식어이기도 하다. 오종은 인간관계가 빚어내는 극단적 양상, 이를테면 근친상간, 강간, 살인과 자살 등 죽음, 또는 좌절감이나 허무를 이미지화하는 데 매우 능숙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의 악취미가 구체적으로 부각되는 때는 악랄하거나 절망적인 전시들이 행해지는 시간 자체가 아니라, ‘전시들 배후에 그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는 이가 감지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다. 내러티브가 삶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는데도 등장인물의 머릿속은 정작 ‘왜’와 ‘어떻게’가 부재한 상태임을 발견케 되는 시간, 다시 말해, 부조리한 관계가 일종의 운명으로써 관철되고 있음을 관객이 인식하게 되는 그 지점.

<워터 드롭스 온 더 버닝 락>의 경우 - 영화가 풍기는 당혹스러움은, 뚜렷한 징후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잠을 청하듯 자살하는 프란츠와, 죽은 그를 옆에 두고도 권력자가 던지는 달콤한 욕망의 미끼를 무는 데 급급한 인간군상에 그 뿌리를 둔다. 동성애나 쓰리섬 등 관계 맺음의 표면이 아니라, 끊임없이 부조리로 수렴되어 가려는 나태함, 그것이 문제다.


이처럼 치명적 관계라는 덫에 걸려 있음에도, 오종의 인물들은 ‘관계 바깥에서 관계를 사유’하지 못한다. 관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힘은 대개 과거의 자신 또는 현재 권력자와 ‘동일자-되기’ 전략에 기인하며, 그러한 맹목적 욕망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끊임없는 결핍들은, 퇴행과 훼손이라는 암울한 해결책을 통해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는 한다. 따라서 오종의 작품에서 ‘불우한 내일’의 징후가 감지된다는 것은, 삶을 주체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하고 운명의 무게를 스스로 무겁게 만드는 ‘불우한 영혼들’ 또한 거기에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무언가를 향한 끊임없는 종속’이라는 공식에 갇힌 인간들. 그들이 엮어내는 거의 최대치에 다다른 듯한 삶의 불확실성이야말로, 오종이 지닌 악취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가끔씩) 관객이 그러한 불확실성에서 현실 속 모호함과 관련된 단서를 찾아내고 이해 불가했던 부분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할 때, 오종의 악동 기질은 놀랍게도 진짜 빛을 발한다. 그 빛은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쓰이지는 않을지언정, 어지러이 흩어진 삶의 조각들에 대면해 ‘왜’와 ‘어떻게’를 다시금 꺼내게 만드는 데는 꽤나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방향을 잃은 채 충돌하고 죽어가는 오종 영화 속 욕망들은, 현실의 파편들이 남긴 낯섦과 현기증, 바로 그것의 상징적 투사물이기 때문이다.


<5x2> 헤어짐에서 만남까지, 그 균열의 연대기

<5x2>는 한 커플의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시작. 부부였던 질과 마리옹이 담담하게 이혼 절차를 밟는다. 그리고 마지막 섹스, 아니 강간이 이어진 후, 질은 마리옹에게 “다시 노력해보는 건 어때?”라고 물어온다. 상처를 주고받는 행위는 두 사람 사이에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무슨 일이 (한때는 분명 사랑이라 불렸을) 그들의 관계를 일상화된 폭력의 형태로 변질시킨 것일까. 이에 프랑수아 오종은 첫 만남에서 이혼까지를 축약한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시간 역순으로 전개, 어긋난 양상이 드러났던 그 순간들을 하나둘씩 더듬어간다. 이혼 및 강간, 불신만을 확인시켜준 디너파티, 축복받지 못한 출산, 불길한 기억을 남긴 첫날밤.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매겨져야 했을 삶의 중요한 길목들은, 이처럼 질과 마리옹에게는 불신과 단절과 균열의 연대기를 상징하는 증거물이 될 뿐이다. 붕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붕괴를 만들어온 균열들이 눈에 띄지 않듯이, 질과 마리옹 사이의 내파는 조용하되 묵직하게, 그렇게 진행되어온 것이다.

한 부부의 우울한 여정을 되짚어온 카메라는 이제 필연적으로 관계의 기원과 마주친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바닷가에서의 첫 만남. 물론 질과 마리옹에게는 애초에 어긋남이 존재하지 않았던 설렘의 시공간으로 그 만남이 이해되겠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내러티브 덕에 관객은 그 설레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어긋남의 ‘축적’과 동일한 맥락 안에서 목격해야 한다. 때문에 해변에서의 첫 만남은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표면적 의미 외에, ‘일그러지게 될’ 관계의 태동이라는 비극적 의미도 포함한다. 하나의 상황, 그러나 그것을 둘러싼 ‘시간’이 두 가지 층위 -질과 마리옹의 시간/관객의 시간- 로 명백하게 분산되면서, 두 시간 사이에 놓인 간극의 크기만큼이나 관계에 얽힌 아이러니 또한 증폭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후자의 시간에서 전자의 시간을 전지적으로 내려다보기. 관계 바깥에서 관계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오종의 세심한 배려.


관계의 망으로 포섭되기를 희망하는 인간들. 바다는 따스한 얼굴로써 그들을 유혹해 아름다운 만남을 선사하지만, 그 포용력 아래에는 관계의 비극성을 잉태하는 치명적 덫으로서의 속성이 도사리고 있다. 바다 한 가운데서 서로를 바라보는 질과 마리옹의 얼굴을 작은 ‘두 점’으로 포착하는 마지막 롱숏이, <사랑의 추억>에서의 마지막 ‘두 점’과 비슷한 구도를 지니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테다. 바다와 유사-죽음의 상관관계. 오종은 역시나 오종이다.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끌어들여 불변성에 대한 기대를 품게 만들지만, 흐르는 시간은 인간을 지속적으로 실험하며 사랑에 균열을 초래하고는 한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것일까. 아니면 ‘일상의 전개’가 인간의 나약함을 파고드는 것일까. 혹은......? 여전히 어려운 류의 질문들. 프랑수아 오종의 앞으로의 필모그래피가, 그래서 나는 더더욱 궁금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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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이 창창한 서른 한 살의 사진작가 로맹.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암이라는 당혹스러운 선고가 내려진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3개월 정도. 죽음이 손에 잡힐 듯한 거리까지 다가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당혹감과 두려움, 그리고 자괴감에 로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한다.

<타임 투 리브(Le Temps Qui Reste)>는 프랑수아 오종이 <사랑의 추억>에 이어 만든, ‘죽음’을 테마로 하는 두 번째 작품이다. 오종은 질서와 권력의 흐름에 순응하거나 혹은 거스르기 위한 방법으로서 선택되는 ‘욕망들’에 종종 주목해온 감독. 수단과 목적이 역전되거나 그 경계가 모호해질 무렵, 그의 영화 속 욕망들은 종종 인간을 파멸로 밀어 넣는 단계까지 발현되고는 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한 뒤틀린 내러티브나 도발적이고 과격한 에로티시즘 덕에 ‘악동’이라는 별명 옆에는 ‘재능을 허비하는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기도 한다. 냉소와 위트를 격렬하게 오가며 기존 가치체계나 ‘관계 맺기’ 속 허위를 조롱해온 그를 떠올릴 때, <타임 투 리브>의 ‘얌전함’은 다소 의외일 수도 있다.

주인공 로맹의 죽음은 어떤 인위적인 개입이 없는 순수한 형태의 엔딩이다. 그래서 동성애자임에도 로맹의 병명은 굳이 ‘에이즈’가 아니라 ‘암’이다. 수직적인 질서체계를 과도한 욕망으로써 종단, 추락을 자초해온 오종의 기존 인물들과 달리, 로맹은 모든 욕망을 생의 저 주변부로 밀어내려고 한다. 프랑수아 오종은 그러한 관계 끊기가 진정한 관계 맺기의 출발이 됨을 암시하며, 그동안 자신이 이야기해온 주제와 결국은 같은 맥락의 주제를 또 다른 문장으로 읊조리고 있다. 전작들이 “욕망이 있는 곳에는 이미 힘의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미셸 푸코의 말에 충실했다면, <타임 투 리브>는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즉 욕망을 떠나보낼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고 말하는 영화인 셈이다. 관계를 끊음으로써 진정한 관계를 맺고, 무한한 고독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평온해지는 인간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던 로맹은, 결국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본질적으로는 낯선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영원한 침묵을 맞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때문에 로맹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데 동참하는가 하면, 문득문득 환기되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차분하게 조응하면서 기억을 ‘추억’으로 자리매김 시키기도 한다. 죽음과의 대면이 삶을 일깨운다는 역설, 마지막을 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자가 어디 로맹뿐이겠는가. 사진작가인 그는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각인하고 싶은 듯 카메라로써 그들의 순간을 조용히 기록하기도 한다. 렌즈를 관통하는 그 아련한 시선이야말로 죽음을 앞둔 자가 취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최선의 예의일 테다.

로맹의 짧은 여정이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오종의 씁쓸한 고백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한 하늘. 영원한 고독은 어쩌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로맹은 처음 그곳으로 돌아가 다시금 그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걸까. <타임 투 리브>는 3개월 후일지 30년 후일지 모를 우리들의 죽음을 미리 따라가 보는, 짧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성찰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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