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에는 사이다

덜컹덜컹.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오는 기차. 오랜 산고 끝에 이제 겨우 세상으로 나오게 된 아기의 몸짓처럼, 기차 한 대가 햇볕의 따스함을 마음껏 느끼며 힘차게 내달린다. 영화 <가족의 탄생>이 서사의 운을 떼는 지점은 그 즈음이다. 캄캄하고 매캐한 터널을 인내했음에 빛의 입자들이 기꺼이 환호를 보내주는 바로 그 시간, 아마도 어두움의 일단락이거나 어두움이 준 선물이거나.

때마침 기차 안에서는 채현과 경석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경석이 말한다. “세상에는 참 어울리는 것들이 있어요. 계란에는 역시 사이다거든요.” 별 다른 유사점이 발견되지 않던 계란과 사이다는, 같은 장소에 놓이고부터는 어느새 각각의 단점을 메워주는 단짝으로 여겨져 왔다. 이는 두 먹을거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서로의 조합을 긍정적인 결과로 만들기 위한 근거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각각의 개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계란과 사이다’라는 또 다른 먹을거리가 생성되는 동안, 개성들은 오히려 더욱 또렷해져왔다.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마치 정반합(正反合)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흐름은, 결코 시간의 경과나 공간의 농익음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주체와 주체의 화학반응을 일구어낼 수 있는, 다시 말해, 다른 주체를 수용할 만한 역량이 거기에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가족의 탄생>은 바로 그러한 역량에 관한 영화다. 이를테면, 역량들이 시공간의 좌표 위에서 어떻게 합생(coalescence)의 곡선을 그려 나가느냐 하는 이야기. 그래서 핏줄이라는 끈이 너덜너덜해져버린 가족사로, 일단은 파고들어야 하는 이야기.



항상 먼저 도착해버리는 결핍들

이 즈음에서 ‘가족’(家族)의 사전적 의미 -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그 구성원.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혼인’과 ‘혈연’이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방점은 언제나 이 두 단어에 찍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가족의 기본 구조를 설정할 때 이미 찍혔던 방점이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발생 가능하거나 이미 존재 중인 다른 가능성을 차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시 찍히는 순간들에 있다. 그럴 때마다, 혈연의 순리적 흐름을 지키지 못한 구성원에게 방점은 일종의 낙인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폭력성의 기저에는 물론 초월적 기호로서의 ‘남근’(phallus)이 자리 잡고 있다. 남근이 사회의 몸과 머리에 그 뿌리를 깊게 내린 경우, 혼인과 혈연의 배경을 하나의 남근으로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함은 사회적 열등의 충분조건이 되기 십상이다. 1차 집단 간 차이가 결핍의 생성을 필연적이고 선험적인 것으로 만드는 셈이다. 그렇게 ‘이미 거기에 먼저 도착해버린’ 결핍들은, 부지불식간에 누군가를 ‘비정상 가족’으로 호명(呼名)하고는, 반대편에서는 ‘정상적인 다수’의 성곽을 안팎으로 견고하게 만들기에 이른다. 방점이 다시 등장하는 이유는, 이렇듯 결핍을 매개로 든든한 구획을 짓기 위함이며, 비정상이라는 낙인은 매우 신속하게 찍히기 마련이다.

정상적인 틀에서 벗어난 가족사는 TV나 영화 등 많은 매체를 통해 꾸준하게 나열되고 또 걱정된다(특히나 요즈음 비정상 가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TV 드라마를 찾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중요한 질문 한 가지. 그렇다면 그러한 이야기들은 현실에서 끌어온 가족 해체의 양상과 그로 인한 갈등을 과연 어떤 방법으로 걱정하는가? 다시 말해, 불륜과 삼각관계의 부산물이라는 외양의 전시 이외에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여전히 회의적일 답변일 테지만, 대부분의 가족 이야기들은 무너진 혼인 및 혈연관계를 규정된 가족의 모양새로 재편되어야 할 소재로, 갈등 역시 그 규정된 영역으로 편입된 후에나 봉합 가능한 것으로 바라볼 뿐이다(가족의 틀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새 짝을 찾아야 하는 이혼녀/이혼남들, 그러지 않고서는 웃을 수 없는 그들의 아이들). 이는 오히려 방점을 보다 공공연하게 찍어 정상적 가족 형태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려는 흐름에 가깝다. 가족을 끊임없이 붕괴시키면서도 그 자체를 둘러싼 맥락을 짚으려는 몸짓이나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의 방향성을 찾으려는 전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한국형 가족 이야기의 씁쓸한 현주소인 셈이다. 문제의 해결책을 비정상에서 정상으로의 전환에서 찾음으로써 비정상이라 호명하는 것을 자연화(naturalization)시키는 동안, 결핍의 생성은 그저 ‘정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고 만다. 이 같은 가족 이야기들은 그저 세상에 널려진 지독한 이항대립의 또 다른 판본일 뿐일 터, 진부하게도 ‘위로’는 우월한 개인들을 향해서만 열린다.



헤픔과 구질구질함, 그 위대한 역량

영화 <가족의 탄생>이 빛나는 이유는 바로 그 진부함을 벗어던졌음에 기인한다. ‘틀 이론’을 넘어 관계의 본질로써 가족의 역사를 서술, 열림을 향한 노력이 수용의 역량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며, <가족의 탄생>은 가능성의 차원을 실천적 이미지로 옮겨낸다. 결핍으로 읽힐 법한 개인 간 어색한 조합이, 가족의 형태에만 천착하는 가시적 수습을 넘어 비로소 형질 개선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 놀라운 서사에는 물론 아픔이 따른다. 기차가 햇볕을 누리기까지 긴 터널 속에 존재했듯이, 채현의 ‘어머니들’인 미라와 무신, 그리고 경석의 누나 선경 역시 오랜 세월 시련과 부딪쳐왔다. 김태용 감독은 등장인물의 아픔을 구구절절 나열하는 대신 상징적인 심상(心像) - 미라와 무신이 말없이 밥을 먹는 사이로 채현이 마당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씬/매자(선경 母)의 가방에서 물건들이 떠오르는 씬 - 으로 압축해서 표현하는 전략을 택한다. 덕분에 프레임에는, 관계에 얽힌 감정들이 농밀한 색채 그대로 차분하게 펼쳐진다. 타인의 삶을 질량으로써 혹은 남근으로써 환원하고 측정하는 오만함이 끼어들 자리는, 거기에 없어 보인다.

후반부 경석이 채현과 함께 채현의 두 어머니를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영화는, 미라와 무신의 간격이 시간 터널을 통과하면서 어떤 놀라운 미덕으로 전환되었는지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말없이 밥을 먹어야 했던 어색한 공기를 걸쭉한 입담이 오가는 자매애의 공기로 변화시킨, 포용의 역량(물론 이기적인 남근들에 한해서는 영원히 예외다). 합생의 곡선을 성공적으로 그려낸 그 역량은 채현에게 ‘헤픔’으로 나타나고, 채현의 두 어머니를 만나고부터 경석은, 밉기만 했던 헤픔들을 다른 각도에서 추억할 수 있게 된다. 경석의 머릿속에서 폭죽과 함께 밤하늘로 떠오르는 누나 선경의 이미지. 엄마 매자와 누나 선경, 그리고 채현의 너무나도 닮았던 ‘구질구질함’이 비로소 ‘정’(情)의 영역으로 들어선 셈이다. 마치 에너지 보존의 법칙처럼, 역량은 힘을 잃지 않고, 그렇게 유전되고 공유되며 또 확장된다. 그녀들의 헤픔은 거기서, 오늘도 열린 체계를 꿈꿀 테다. 소박하되 위대한 그 화학작용이 진짜 방점임을, 차근차근 증명하며.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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