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이오 주 작은 마을의 한 인형공장. 카일은 인형의 팔과 다리와 머리를 생산하고, 마샤는 그 머리들에 눈을 박고 가발을 씌운다. 이 곳에서 노동의 목적을 묻는 것은 일상의 비참함을 새삼 인식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 인간은 부품이 되고, 노동은 진부하게 반복될 뿐이다. 대화는 겉돌거나 어긋나기 일쑤지만, 소통을 향한 의지를 상실한 그들은 이제 그 지긋지긋한 '어긋남들'에조차 익숙하다(혹은 익숙한 척?).

카일과 마샤, 그리고 로즈까지, <버블>(Bubble)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온전한 가족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정물로서 전시되기만 하는 가족들과, 구원과는 거리가 먼 나약한 존재로서의 신. 소통할 만한 활로는 모두 봉쇄되었기에, 그들은 그렇게 절대적 소외와 무표정을 향해 하루하루 수렴해갈 뿐이다. 따라서 조작된 하나의 표정을 갖고 살아야 하는 인형과 표정을 점차 잃어가는 사람들(특히 마샤)은 병치되며, 싸늘하고 건조한 시선만이 자본의 뒤안길, 그 고된 일상들의 조각들을 더듬어간다.

'버블'이라는 제목처럼, <버블>에 등장하는 피곤하고도 지나치게 나른한 삶은 거품과도 같은 어떤 위장된 표면으로 가려져 있다. 거품은 결국 터지기 마련. 일상은 미묘한 흔들림을 내비치며 표면에 균열을 만들어내다가는, 결국에는 농축된 감정의 순간적 폭발과 더불어 붕괴되기에 이른다. 놀랍고도 슬픈 사실은,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러한 붕괴들은 몹시도 사소한 수준에서 취급되고 있으며, 붕괴로 생긴 구멍 또한 너무나도 간편하게 메워질 것이라는 점이다(또는 그 따위 구멍, 수습하든지 말든지 세상은 잘 돌아간다?).

일상에 숨은 어떤 '무엇'을 다룬다는 점에서 <버블>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데이빗 린치의 인물들이 음울한 판타지와 확대된 이드의 범위에서 일상에 잠재된 광기를 경험했다면, 소더버그의 '누군가'는 끊임없이 소비되고 소외되는 삶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대상마저 불분명한) 분노를 축적해오다가는, 결국 균열을 견디지 못한 채 세상의 끝을 경험하고야 마는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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