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용이 폭력적인 걸 넘어, '영화' 그 자체가 '폭력'인 영화, <퍼니 게임>(1997). 러닝 타임이 고스란히 관객 가학의 시간으로, 영화한테 내내 싸대기만 맞다가 어? 하고 끝난다.

 

* '기계'인 카메라를 관객 각각의 심리적 영토 안으로 슉, 순간이동시키는 미카엘 하네케는, 영화판의 연금술사가 아닐까.

 

- 그러니까 퍼니 게임을 25년 만에 다시 보고 기분이 막 상해버린 상황.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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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없는 롱숏-롱테이크가 이토록 불확실·불안·불온하나니, 요동치는 건 서사가 아닌 너와 나의 마음.

 

기계로서의 카메라를, 등장인물은 물론 관객 각각의 심리적 영토로까지 슉, 순간이동해내는 마법. ⓒ erazerh

 

 

* 이제야 챙겨본 미카엘 하네케의 2005년작. 나한테 더 와 닿는 건 사실 바로 앞선 <늑대의 시간>(2003)이긴. 아무튼 물리적 관찰자라는 카메라의 속성 자체를 변환시키는 데는, 미카엘 하네케만 한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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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늑대의 시간>, 그 마지막 숏. 카메라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하나의 풍경이 사라진다 싶으면 이내 다른 풍경이 프레임으로 들어오고, 동시에 그 풍경 또한 밖으로 밀려난다. 지루한 규칙성. 이 숏은 <400번의 구타>의 ‘드와넬 도주 숏’과 닮았다. 드와넬이 소년원으로부터 도망쳐 달리는 모습을 담은 트래킹 숏. 프레임 가운데에서 드와넬이 ‘여전히’ 달리는 동안, 풍경은 끊임없이 스쳐 지나간다. 풍경의 스쳐 지나감이 더 이상 새롭지 않게 되면, 어느새 프레임에는 달리는 드와넬만이 남는다. 마치 그가 거기서 영원히 달릴 것만 같다.

<늑대의 시간>의 마지막 숏은 처음부터 끝까지 풍경의 지속이다. 그 나른한 풍경들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기차 내부에 위치한 가상의 눈이자 관객의 눈이다. 기차를 기다리던 피난처의 사람들을 풍경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고 그 눈이 깨달을 때, 풍경의 연속적인 움직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결국 피사체는 모호해지고 창밖을(스크린을) 응시하는 눈은 흐려진 초점으로 멍하니 고정된다. 기차의 시간은 달리고 있는 ‘지금 현재’로만 남을 것이며, 멈추지를 않으니 피난처 사람들을 태울 수도 없다(그들이 이미 기차를 탄 상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차와 사람들은 설령 같은 시간대에 속했다 해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관계에 놓인다. <늑대의 시간>의 이 마지막 숏은 희망을 배반하는 일종의 반전인 셈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피난처의 신경질적인 소음들이 줄어들 그 즈음에는, 기차가 멀리멀리 돌아서라도, 그들 앞에 도착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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