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가 궁금하고 또 기대되는 이유. 단도직입적으로, 봉준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봉준호인가.

봉준호 영화를 추동하는 핵심 모티브는 ‘실종’이다. 누군가 사라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플란다스의 개>의 개들과 <살인의 추억>의 여자들, 가깝게는 <괴물>의 현서가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돌아가는 세계가 있다. 시위대를 치워버림으로써 깨끗함이 유지되는 거리, 여자들이 묻힌 땅 위를 흐르는 공장의 부지런한 기계음, 실체 없는 공포 덕에 굳어지는 도시의 암묵적 질서 따위. 요컨대 강제적인 봉합이 이뤄지고 곧바로 자기만족이 뒤따르는 꼴이다. 이 꼴들이 겹겹이 쌓인 상징계는, 얼마나 위선적인가. TV 속에서 토론을 펼쳤던 <지리멸렬>의 저 뻔뻔스러운 지식인들을 기억해보자. TV를 끄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늘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상징계에서는 필요에 따라 몇몇 삶이 수집되지 않기 마련이다. 봉준호 영화의 미덕은, 바로 파편으로 존재하는 그 삶들을 희비극의 형태로 복원한다는 데 있다. 이는 대책 없는 낙관이나 비관이 아니라 ‘환기’와 ‘각성’의 제스처다. 그래서 ‘짝퉁’들의 세계와 그 부조리가 일단 구조화 되고 나면, 우리는 송강호의 마지막 눈빛,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관통하는 그 서늘한 응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마더>. 봉준호 감독은 작년 이맘때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항상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영화만 만들었다.”며, <마더>를 일컬어 “중심을 향해 들어가는 나의 첫 작업”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이 말이 이번에는 외부가 아닌 내부를 일그러뜨릴 것이라는, 봉준호의 은밀한 선언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상징계의 붕괴를 누군가의 심리적 심연에서부터 진전시키는 것이 ‘중심을 향하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겠다는 느낌에서다. 이제 그 <마더>가 마침내 공개됐다. 봉준호한테 히치콕이니, 알모도바르니 하는 수식어가 붙는 중이다. 정말로 봉준호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한 기호 —엄마— 를 들쑤셔 놓았을까. 확인해 봐야겠지만, 최소한 우리가 알던 ‘엄마’가 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음은 명백하리라.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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