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페인 감독, 삶의 굴곡에서 따뜻함을 찾아내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 불리는 큰 길 위를 달려간다. 하지만 매끄럽게 닦이고 곧을 줄만 알았던 그 길에는 우리의 순탄한 행보를 방해하는 것들, 이를테면 슬픔, 좌절, 절망 등과 같은 삶의 무게들이 암초처럼 곳곳에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내가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도 하며, 길 위에 놓여진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내 손을 잡고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줄 누군가를 찾거나 다시 한번 내달릴 수 있을 만한 어떤 원천, 즉 살아가는 의미를 건져 올리고자 절박하게 애쓴다.



두 중년의 여정 다룬 로드무비

<사이드웨이>는 인생의 중간 지점을 살짝 넘긴, 주름이 살짝 패인 두 남자의 짧은 여행을 다룬 영화다. 물론 이 로드무비 안에서 10대, 20대의 모험에서나 엿볼 수 있는 새로움에 대한 설렘과 두근거림을 찾기는 힘들다.

대신 영화는 결혼을 앞두고도 성욕을 강변하며 마지막 자유를 불사르고자 하는 능청스러움이나, 잠시 떠난 중에도 재혼한 전처와 일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모습 등, 지독히도 현실적인 단면들로 이들의 여정을 채운다.

와인 애호가 마일스(폴 지아마티)는 결혼을 앞둔 플레이보이 친구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과 함께 와인 농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잭은 와인보다는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해방감을 위해 길을 나섰고 마일스는 마음 한구석에 소설이 출판될지 안 될지에 대한 초조함을 담아두고 있다. 두 사람의 모험이 순탄하지 못할 것쯤은 애당초 예견되는 스토리다.

게다가 잭에게서 전처가 재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일스가 한층 더 신경질적으로 변함에 따라 조용히 출발했던 여정은 점점 더 불확실하게 흘러간다. 잭이 결혼 이야기는 숨긴 채 우연히 만나게 된 ‘화끈한 여자’ 스테파니(산드라 오)와 밤낮없이 몸을 사르는 동안에도 마일스는 책의 출판 문제와 전처에 대한 여운이 한데 뒤섞인 복잡한 심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에게 약간의 관심을 비춘 마야(버지니아 매드슨)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앞으로 나갈만한 확신을 갖기가 두렵다. 게다가 잭이 이미 소설은 나오기로 결정됐다고 태연하게 거짓말해놓은 통에 그녀에게 솔직하지도 못한 상황이다. 그들의 와인 기행, 새로운 만남은 그렇게 무엇인가 조금씩 어긋나 있다.


그 중 공들였던 일에서는 허무하게도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인간관계에서는 하릴없는 상실감만 좇아야 하는 마일스의 불운은 특히나 우리 삶의 단면과 너무도 닮았다. “우리 나이에 돈 없으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마찬가지”라는 대사에 한숨 내쉴 수밖에 없는, 소박함에서 씁쓸함을 전달받는 우리들 말이다. 

삶의 큰 길에서 어떤 목표를 잃었을 때, 내 보잘것없음이 쓰라리게 다가올 때 마일스가 그랬듯, 우리는 다시 나를 길 위에 바로 세워줄 그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알렉산더 패인 감독은 이처럼 쉽지 않은 상황에서 다소 한가롭게도 쉬어갈 것을 제안한다.


황량한 뒤안길에서 한적한 샛길로

전작 <어바웃 슈미트>를 통해 인생의 황량한 뒤안길에서 씁쓸하게 웃음 짓던 감독은 <사이드웨이>에서는 한결 밝은 어조로 잠시 한적한 샛길로 가서 다시 돌아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해온다. 바빠서 어디 두었는지도 잊어버린 이정표는 잠시 놔두고서 말이다.

영화는 좌절하고 우울해야 마땅할 상황에서도 웃음만은 놓지 않는다. 웃음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 꾸밈없는 에피소드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그리고 이 같은 솔직한 전개들은 <사이드웨이>의 모든 플롯을 아우르는 화법, 즉 ‘당신 삶은 여전히 따뜻하다’를 말하는 시선 속으로 차분하게 편입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담긴, 인상주의 화폭을 보는 듯한 와인의 본고장 산타네즈 밸리의 전경은 영화가 그리는 여유로운 시선과 닮아 있기도 하다. 감독은 또한, 인생을 와인이 숙성되는 과정에 빗대면서 삶의 굴곡이 궁극적으로는 완결된 페이소스로 가기 위한 일종의 숙성 단계임을 은유한다.


“오랜 세월 동안 숙성을 거쳐 최고의 맛을 선사한 후 생을 마감한다.”라는 마야의 와인에 대한 단상은 결국 길 위에 쓸쓸히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따뜻한 조언이자 그들의 고단한 영혼에 고결함을 불어넣는 예찬인 것이다.

영화 내내 샛길로 돌아왔건만 마일스는 다시 힘차게 달릴 어떤 계기도 찾지 못한다. 그 많은 소동을 피우고도 결혼에 골인하는 잭과 달리, 그는 좌절된 소설에 대한 꿈과 전처를 향한 부질없는 미련이 엉켜 여전히 씁쓸한 마음을 달래지 못한다.

<사이드웨이>는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고이 숨겨두었던 샛길의 선물을 살짝 공개한다. 마지막 장면, 마야의 집 문으로 다가가는 마일스의 손길은 우리에게 미묘하게 떨리는 설렘을 전달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야 마일스는 최고의 맛을 내기위한 발걸음을 비로소 내딛기 시작할 것이다. 희망의 작은 심장박동은 그렇게 잔잔하게 울린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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