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공주>는 복수로 시작해 복수로 끝나는 영화다. '복수'하면 빠질 수 없는 올 여름의 화제작 <친절한 금자씨>가 '과연 복수로써 상실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가, 속죄는 가능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영화인 반면, <오로라 공주>는 애초에 속죄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염두에 둔 채 출발한다. 즉, 영화는 죽는 길 외에는 아무 것도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스스로의 죄의식에 비해 세상과 타인을 향한 증오가 너무나도 크기에, 정순정의 상실감이 복수로 연결되는 데는 일말의 주저도, 후회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의 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정순정이 마지막에 죽이려고 남겨놓은 사람이 누구인지 보라.

한편으로는 연쇄살인의 희생자들이 의도적으로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기에,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올 법하다.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영화의 궁극적인 의도는 '그런 싸가지 없는 인간은 모조리 죽어야 한다.'에 있지 않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집단적으로 상실한 이 사회, <오로라 공주>는 결국 그런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폭력의 현장이 되고 있음을 복수극의 틀을 빌려 말하는 영화다. 따라서 정순정의 분노는 수많은 미필적 고의와 예의 없음과 무관심이 관철되는 이 속물들의 천지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 이하 스포일러 있을 수 있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상의 무덤덤한 규칙성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 당연함의 수준을 넘는 어떤 섬뜩한 이기주의를 만날 때면 참기 힘들다 못해 슬프기까지 한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발가벗겨진 채로 쓰레기매립지에 죽어있는 제 자식을 봐야하는 동안, 또 다른 누군가가 그저 화젯거리 하나 얻었다고 낄낄거리는 일이 가능하다면, 세상은 절대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같은 무게로 슬퍼할 수는 없을지언정, 죽음에 대한 예의는 갖추고 살자. 그리고 평소 타인에 대한 예의를 망각하고 살던 자들은 오로라 공주를 조심할 것.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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