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만큼 '기억'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는 예술장르가 또 있을까. 시간을 자유로운 상상으로 편집, 그것을 역동적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아마도 기억을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유려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기억에 관한 영화는 물론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 생각나는 것 몇 개. <메멘토>는 10분씩 쪼개진 기억들을 시간 역순으로 조합해 비극 주변을 '영원히' 서성여야 하는 슬픈 운명을 절묘하게 담아냈으며, <트루먼쇼>, <다크 시티>, <매트릭스> 등의 영화는 '지금 이순간, 나는 진짜인가?'라는 의문에서 시작, 각각 기억에 대해 다양한 변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21그램>이 기억을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자들의 슬픔에 관한 드라마였던 반면, '잊고 있던 아련한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비포 선셋> 같은 영화도 있었다. 영화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주는 데 '기억'보다 더 요긴한 장치가 또 있을까 싶다.

이 '기억'이라는 테마가 영화의 영원한 관심사이자 인류보편의 감정인 '사랑'과 만났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이터널 선샤인>은 지금 나를 미치게 만드는, 한 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기억을 망각하기 위해 떠났던 조엘이라는 남자의 이 여행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망각하고 있던 것들을 다시 기억하기 위한 여행으로 바뀌게 된다.즉, <이터널 선샤인>은 한 남자가 자신의 머릿속을 탐험하는 자아성찰기인 셈이다.

조엘은 시간 흐름과 감정의 굴곡을 통과하는 사이 흩어졌던, 혹은 변질되었던 기억들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봄으로써, 그 순간들에 존재했던 진실의 기운을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된다. 상대를 모욕했던 후회스러운 순간을 시작으로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기억은 처음의 순수했던 설렘이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꿈이 공존하는 초현실적이고 모호한 공간 속에서 그가 느끼는 유일하게 선명한 감정이 바로 그녀를 잊을 수 없음, 즉 '사랑'인 것이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었던 그 기억들 하나하나를 '그녀와 함께 존재했었다'로써 묶을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조엘의 망각 여행은 그래서 기억지키기 여행으로 바뀌게 된다. '사랑'이라는 평범한 테마는 찰리 카우프만과 미셸 공드리의 손을 거쳐 창조적 플롯이 빛을 발하고 드라마는 감수성으로 충만한, 이처럼 아름다운 영화로 완성되었다.

누구에게나 힘들게 하는 기억,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기 마련이다. 이제 그 기억들로 차분히 들어가 그곳에 있는 당신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 <이터널 선샤인>은, 현재의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그 방법을 슬며시 열어두었다. 가끔씩 어떤 영화들은 당신의 인생에 꽤 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귀 기울일 가치가 있는 영화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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