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은 곧 상실의 축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다 많이, 자주 잃어야 한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섭리지만 또한 두려운 변화이기도 하다. 내 삶의 핵심을 이루던 조각이 떨어져나가 생긴 공백들은 사실상 영영 메울 수 없는 까닭이다. 게다가 결국은 오고 말 마지막 상실, 나의 최후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 죽음에의 상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하 스포일러)

 

 


클린트 이스트우드한테도 죽음은 점점 더 무거운 것이 되어갔다. 악당들을 거침없이 처형하던 그때 그 터프가이를 훗날 늙은 무법자의 자리에 앉혀 회한에 묻히게 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용서받지 못한 자>). 폭력의 잔혹한 굴레에 환멸을 느끼지만 결국 과거의 핏빛 무대로 소환되어 버리는 ‘더티’ 윌리엄 머니. 하지만 악을 소탕하는 일은 내러티브를 정리하는 장르적 해결책으로 더는 기능하지 못한다. 죽고 죽이는 데 아름다운 구실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감독 이스트우드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와서 떠나보내는 자의 고통과 한탄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에 이른다. 눈물 짜내는 공식을 읊지 않음에도 영화는 갖가지 정념으로 들끓는데, 프레임 내부에서 소화되지 않은 어떤 잉여의 비극성이 관객의 감정이입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울어 마땅한 사람이 울지조차 못하니 보는 이의 마음이 어찌 더 아프지 않을까. 마지막 숏인 이스트우드의 쓸쓸한 뒷모습은 절제가 영화를 어떻게 위대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늘 전보다 조금 더 짙고 묵직한 색채로서의 죽음, 그에 따른 깊은  울림이 있다. 누군가의 끝이란 적어도 이스트우드에게는 일회성 감정으로 소비될 소재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해놓고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걸쭉한 무언가였던 셈이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내용과 별개로, <퍼펙트 월드>의 최종 숏이 그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이유는.

<히어애프터> 또한 ‘죽음’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영화다. 여기에는 세 종류의 죽음, 그리고 그것에 얽힌 사람들이 있다. 저세상으로 가는 문턱을 넘었다가 간신히 되살아나는 여자, 세상 유일한 벗과 다름없는 쌍둥이 형을 사고로 떠나보내는 소년, 그리고 죽은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탓에 산 사람의 고통․치부 역시 알아야 하는 한 남자. 영화는 이 세 명의 이야기를 교대로 보여주다 마지막에 한 데 모으고는 서로한테서 구원에 관련된 힌트 같은 것을 발견하게끔 한다. 교차편집 형식을 띠기는 하지만 시간을 뒤섞거나 사건을 꼬는 등의 잔재주는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죽음의 문턱 너머 일부만 비추다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데, 그로 인해 현실 속 혼란과 수습의 과정이 전작들보다 한층 도드라진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는 죽음은 강렬한 여운을 빚어내는 한 방이 아니라 한결 무게가 덜어져야 할 슬픈 기억으로서의 기표다. 방점이 곧 이후의 삶 위에 찍히는 셈. 이에 맞게 엔딩 시퀀스는 처음 만나는 연인의 구도를 취하며 말줄임표, 열린 결말을 표방한다. 언뜻 해피엔딩으로의 진부한 박제처럼 보이는 마지막 숏이 실은 삶의 전환점, 이를테면 ‘해피-스타팅’이 되는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배우 은퇴작인 <그랜 토리노>에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바 있다. 희대의 총잡이가 총을 내려놓고 적진으로 걸어 들어갔음은 과거-현재에 대한 회한의 제스처이자 그 마침을 기원하는 일종의 ‘전시’다. 그는 그렇게 제 몸을 바쳐 폭력의 계보가 이어지지 않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이제 그 이후가 말해졌다. 누군가의 끝이 더 이상 묵직한 최후, 평생을 돌아보며 한숨 쉬어야 할 부채가 되지 않기를 이스트우드는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히어애프터>에서 폭력의 부조리한 인과율과 별개의, 부지불식간에 일어나 삶에 개입하는 확률적 차원의 죽음을 본다. 결국은 어떻게 다시 삶에 복무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툭, 던져진 희망. 상실을 수없이 겪고 다뤘을 한 어른의, 곱씹어도 좋을 새 전언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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