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총대 없는 전쟁

글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내용을 알고 봐도 별 상관은 없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시작, 낭떠러지 끝에 작은 신발 한 켤레가 쓸쓸하게 놓여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몸을 던지는 가냘픈 소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카메라가 바라보는 영화 속 세상은 눈을 마주치기조차 두려운, 그러나 도저히 외면할 수는 없는 고통으로 가득하다. 전작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과 <고향의 노래>에서 쿠르드족을 짓누르는 역사의 무게, 삶의 애환을 이야기하던 바흐만 고하디 감독은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거북이도 난다(Turtles Can Fly)>에서 다시 한번 그 외로운 현장으로 들어간다. <거북이도 난다>는 이라크 국경지역인 쿠르디스탄에서 살아가는(혹은 죽어가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 때문에 쿠르디스탄에 모인 쿠르드족 난민들은 어디서 새로운 소식을 알 수 있을지에 매우 민감하다. 따라서 ‘위성’이라 불리는 아이는 어른을 대신해 사람들의 중심에 서있게 된다. 위성 안테나를 만질 줄 아는 그는 어른들에게 명령하고, 그들과 흥정할 줄도 안다. 어릴 때부터 혼자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지만 나름대로 잘 적응한 예라 할 수 있다. 지뢰 탓에 다리 하나가 없는 파쇼 등 또래 아이들과 함께 위성은 매설된 지뢰(미군이 묻어놓은)를 뽑아 근근이 삶을 꾸려나가며 무기를 사기도 한다.

할루자에서 온 헹고라는 소년은 전쟁통에 두 팔을 잃었다. 그의 여동생 아그린의 얼굴에는 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아물 거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라크 군인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해 낳은 아이 리가(앞을 거의 볼 수 없는)를 향한 애증이 그 증거로서 명명백백히 남아있다. 위성의 소박하고도 서투른 접근에 웃을 수 있는 작은 여유조차 그녀에게는 없다.


이렇듯 <거북이도 난다>는 인간의 눈먼 이기심이 아이들에게 남기고 간 황폐한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다. 하늘은 때때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대지 또한 광활한 멋을 부리지만, 그 자연을 채우는 것은 탱크의 잔존물이나 지뢰 더미 같은 파괴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흔적들은 무생물의 싸늘한 이미지에만 그치지 않고 아이들의 몸과 머릿속으로까지 그 뿌리를 내린다. 폭력의 잔가지들은 끈끈하게 축적되어 아이들의 팔과 다리를 잘라냈으며(혹은 잘라낼 것이며), 어린 소녀에게 매일 새벽 자신의 눈먼 아이를 죽이고 자살할 것을 강요한다.

영화가 담아낸 환부가 아플 뿐만 아니라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픈 이유는 이 아이들의 살아가기와 죽어가기가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냉정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일찍 어른과 같은 삶의 방법을 익힌 아이나, 과거의 짐을 견딜 수 없어 제 목숨을 끊는 아이가 공유하는 것은 결국 ‘탈출’을 향한 갈망에 다름 아니다.

<거북이도 난다>는 탈출을 꿈꾸어야만 하는 아이들을 통해 현재진행중인 파괴의 역사를 고통스럽게 늘어놓는다. 영화는 카메라라는 매개체, 즉, 감독의 시선이 개입되기 때문에 결국 완전한 현실을 그려낼 수는 없다는 이론은 잠시 접어두자. <거북이도 난다>를 구성하는 것은 픽션이지만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이 실제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이 쿠르드족인 바흐만 고하디 감독은 “내 영화들은 정치적이지만 내가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쿠르드족의 삶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영화는 자본을 거머쥐는 수단도, 자아를 발현하는 이미지도, 세계관을 담아내는 거울도 아닌 단지 현실 그 자체일 뿐이다. 카메라는 다른 쿠르드족의 총이며, 영화는 곧 전투인 셈이다.


바흐만 고하디의 스크린 안에는 무슨무슨 척하는 위선 따위가 없다. 모든 플롯은 곧 카메라 밖에서도 존재하며, 실제하는 비극은 카메라로 들어와 서글픈 이야기로 나타난다. 따라서 <거북이도 난다>가 그려내는 가혹한 이미지들은 역사가 남겨놓은 서글프고 가혹한 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TV, 신문에 뻔뻔하게 나열된 강자의 잣대와 역사책 속 몇몇 글자들의 한계를 넘어 살아 꿈틀거리는 진실과 만나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거북이도 난다>가 지닌 힘인 것이다.

영화에는 미국의 침공 명분이 거짓됐다느니, 후세인은 처벌받아 마땅하다느니와 같은 이성적 언어들이 들어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작아서 들리지 않았던, 혹은 의도적으로 듣지 않았던 진실의 순간과 가슴 아프게 마주하는 시간이며, 바흐만 고하디가 외로이 시작한 싸움의 본질 또한 그것이다.

이라크전에 관한 CNN 뉴스 장면들이 한스러운 눈물로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헹고와 교차편집될 때, 군인들의 괴물같은 본능에 손을 떨구고 말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아그린이 절벽 끝에서 서럽게 울 때, 우리는 비로소 절망의 일부나마 가슴 속에 담을 수 있게 된다. 관객의 귓속에 아이들의 슬픈 심장박동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 장면에서, 감독은 관객과 감정을 공유하는 방법만이 자신의 유일한 대안이었음을 서글프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상낙원을 건설하러 왔습니다.” 미국의 공허한 메시지가 삐라로 뿌려지는 전쟁 직전의 지점에서 영화는 멈춰선다. 그리고는 극단으로 달려간다. 제 자식을 물에 빠뜨려 죽이고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날리는 아그린. 감독은 질문한다. 여동생과 조카의 시체를 보고서, 팔 없는 헹고는 이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설픈 영어를 구사하며 미국에 은근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위성이 마지막에 달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연 거북이는 날 수 있을 것인가?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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