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난 ‘선택받은 자의 세상 구하기’ 같은 영웅 서사에서는 흥미를 눈곱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재미는커녕 너무너무 시시해서 보다 보면 심신이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고 무력해지는 기분.
그러니까 대개 ‘격이 다른 혈통, 남다른 능력 보유, 고난-고뇌-각성, 세이브 더 월드’ 따위의 이야기 수순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신화와 종교의 화술 아니던가. ‘츄즌 원’인 척하는 자를 겹겹이 둘러싸는 포장과 보존의 기술. 거짓 중에서도 가장 원형·원시적인 거짓. (진부해지니 그만 쓰도록 하자.)
뭐 이런 쓸데없는 얘길하는 이유는, 그래서 나한텐 <듄>이 드뇌 빌뇌브 영화를 통틀어 제일 또는 유일하게 시시했기 때문이다. 전작이 21세기 SF 최고 걸작이었거나 말거나 이번 건 몰입이 전혀 안 돼 끝까지 보는 것조차 인내가 필요했었다는 고백.
+ 같은 이유로 ‘선택받은 자 서사’에 균열이 제대로 날 때는 환장하는 편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끄트머리로 훅! 순간이동, 존재의 지위에 관한 아찔한 공허감을 창조해낸 빌뇌브의 전작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신화를 홀딱 뒤집어 ‘선택받음’에 공포와 비극성을 입힌 <유전>은, 그래서 내겐 걸작 오브 걸작. 헤일 파이몬.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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