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차(賃借)란, 세 들어 산다는 건, 그저 물리적 공간을 빌려 쓰는 ‘거래’ 차원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셋방살이를 반복해대면 그 구질구질함에 치이다 못 해 어느새 서글픔과 분노가 뒤섞인 무언가가 마치 내 원래 성격인 양 마음 안에 콕 박혀 버리는데, 굳이 말하자면 계약서 쪼가리에는 담기지 않는 임차인 가족 특유의 ‘상처’ 정도 되겠다.

 

이를테면 소중한 자식이 하필 하나가 아니고 둘 혹은 셋인 걸 ‘미안’해하며 집주인한테 그래도 “시끄러운 아이들은 아님”을 어필해야 하는, 부모의 그 심경을 들여다보며 생긴, 잘 지워지지 않는 염병할 정서적 얼룩 같은.

 

그렇게 집이란 놈은 물리적 크기도 크기지만 정서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깃든 이분(二分)의 세계로 각인되고, ‘아늑한 집’이 아닌 ‘구질구질한 집’ 언저리에 놓였다는 태생적 불안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첫 가난’은 그런 거다.

 

물론 이건 두려움일 뿐, 환상으로 가는 다리가 아니다. 돈에 환장한 욕망과 무관하단 말이다. 환상을 버리면 된다고? 품은 적이 있어야 버리지. 그저 최악에서 한 뼘이라도 더 멀어지면 생존 확률이 올라갈까, 내 부모와 내가 느낀 기분을, 부모로서 나와 내 자식은 패스하길 희망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생존의 길이 좁아진 데 일조한 자들이, 아파트 환상을 품어도 나보다 수천 배는 더 품었을 자들이, 집이고 정서고 따질 필요 없는 평온한 곳에 저마다 높은 성을 쌓아 들어앉은 자들이 ‘세 들어 사는 삶’ 찬양에 여념이 없다.

 

그것도 제일 예쁘고 깔끔한 임대주택 하나 골라 카메라 끼고 ‘이 정도면 살만 하네’ 따위의 멘트를 첨부하면서.

 

이제 난, 그들이 적폐로 지정한 자들한테서 종종 감지된 처량한 수준의 상황파악 능력과, 아울러 정치적 계산 앞에서 제한 없는 뻔뻔함을 자랑하는 얼굴가죽을, 되레 그들에게서 본다.

 

&이게 내 마지막 실망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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