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꿈꾸는 가족, 그리고 소통


사각의 링이 있다. 또한 스승과 제자가 있다. 뻔한 설정이다. 진부한 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는가. 밑바닥까지 떨어진 제자가 역시 좌절한 경험이 있는 스승을 만나 권투에 눈을 뜨고 인생도 배워나간다. 그리고 링에서 투혼을 불사른다. 물론 중간에 갈등, 실패도 간간히 섞여 있고. 적당한 감동의 스포츠 드라마 한 편이 나올 듯하다.

하지만 감독이 누군가에 따라 결과는 바뀌는 것.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저 그런 감동 일대기를 허락할 만큼 한가롭게 필모그래피를 채워온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삶의 본질을 고민해왔고 그 안에는 늘 그늘진 곳을 향한 시선이 들어있었다. 일흔 다섯에 접어든 노(老)감독은 평범한 재료에서도 인생의 진국을 걸쭉하게 뽑아낼 줄 안다.

그는 전작 <미스틱 리버>를 통해 불확실한 세상에 던져진, 소통하지 못하는 개인들을 그려냈다. 미처 꿰매지 못한 치명적 상처는 세월을 머금고 점점 곪아 영혼마저 잠식하는 법. 치유의 기능을 상실한 인간관계는 친구, 가족이라는 이름표만을 위태롭게 붙잡은 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미스틱 강과 더불어 유유히 흘러갔다. <미스틱 리버>가 그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것이 못마땅했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년이 채 안 되어 최고작을 다시 한번 갱신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모호한 세계, 냉혹한 운명에 갇힌 영혼들에게 작은 해독제를 선사하는 영화다. 이를 위해 노감독은 그다지 새로운 소잿거리가 아닌 권투를 타인과 소통하는 데 서투른 자들을 교감시키기 위한 모티브로 활용한다. 링에 대한 열정과 공감대가 서로의 빈 자리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는 때는 그들이 온 정성을 쏟았던 링에 오르지 않는 시점에 이르러서다. 따라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링에서 모든 것을 뿜어내는 <록키>류와 같은 출발선에 서지만 전혀 다른 지점을 지향하는 영화가 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궁극적으로 내딛는 곳, 서로에게 빈 자리를 내주었던 영혼들이 꿈꾸는 곳은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다. 불확실한 세계를 견디게 해 줄 버팀목으로서 가족의 의미와 역할을 꾸준하게 탐구해온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번에는 유사 부녀 관계라는 내러티브를 활용, 그 고민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는 회한으로 가득한 눈빛을 지닌, 상처 입은 아버지 프랭키로 분한다. 프랭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과 단절되어 있다. 딸에게 꾸준히 쓰는 편지는 어김없이 반송되어 귀갓길에 쓸쓸함만 더할 뿐이다.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가족들은 저열한 속물적 근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인간관계에는 정작 인간에 대한 고려가 없다. 심지어 매기의 어머니는 상처 입은 혈육에게서조차 돈을 갈취할 궁리를 한다. 부재한 아버지를 향한 매기의 그리움은 가족과 정서적으로 교류하지 못하는 현실을 잊기 위한 자기최면일 뿐이다.

가족구조의 해체, 단절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프랭키와 매기는 권투라는 열정을 통해, 그리고 서로의 빈 자리를 안타깝게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연대를 맺어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 고귀한 만남을 향한 예찬은 자연스레 진정한 가족의 정의, 사람 간 교감의 본질에 대한 해답으로 연결된다.

노감독은 인간을 연결시키는 첫 고리가 무엇이든간에 정신적 교감, 사람 자체를 읽으려는 노력이 관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때 인생의 동반자로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삶이라는 치열한 무대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는 것이다.

후반부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절제의 미학에 관한 한 최고의 경지로 내닫는다. 영화는 울부짖어야 마땅한 곳에 멈춰선 채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다. 아니,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한다. 프랭키와 매기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상처 받아 쓰러진 영혼들은 간신히 발견했던 소중한 만남을 영원히 기억하려 한다. 추억을 새기려는 간절한 마음은 운명의 비정함을 탓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 ‘모쿠슈라’의 의미가 프랭키의 입에서 나직하게 새어나올 때, 매기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어보일 때, 그들의 연대는 드디어 깊은 울림에 도달한다. 절제되고 응축되었던 슬픈 감정이, 인간이 소통하면서 엮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페이소스로 승화되는 기적적 순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모든 것을 전달하는 데 아무런 수사도 쓰지 않는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이야기로 전달하는 법. 그는 정통 드라마의 묵직한 힘과 평범하지만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만으로 갖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 슬픈 영혼들의 정신이 진정으로 소통하는 그곳으로 차분하게 달려간다. 물론 모건 프리먼의 삶을 관조할 줄 아는 내레이션과 힐러리 스웽크의 명연기에 그 공을 어느 정도 떼 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는 희미한 창문 너머로 프랭키를 비춘다. 그는 여전히 모호한 세상에 던져진 외롭고 쓸쓸한 노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꿈꿀 수 있다.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씁쓸하게,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퍼펙트 월드’를 꿈꾼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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