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 시대를 향한 베르톨루치의 오마쥬


(마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죽어가는 폴을 뒤로 하고 잔느는 되뇐다. “난 저 사람 몰라. 거리에서부터 쫓아와서 날 겁탈하려 했어. 미친 사람이야. 난 저 사람 이름도 모르는걸.”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마지막 대사다. 계급, 이름을 불문하고 오로지 상대의 육체만을 허무하게 탐닉하던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68혁명이 품었던 꿈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고 프라하의 봄이 총칼에 짓밟혔을 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바탕 축제가 끝난 허탈감 속에 남은 건 오로지 슬픈 육신뿐. 미래에 대한 68세대의 절망, 혁명의 기운이 단절되는 데서 오는 상실감은 존재를 찾는데 실패한 덧없는 몸부림으로 투영되었다.


이 후 <마지막 황제>, <리틀 붓다> 등을 만들며 동양적 세계관을 탐구하는 데 주력해오던 베르톨루치 감독은 길버트 아데어의 소설 ‘Holly Innocents’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68년의 정체성으로 돌아간다. 시네마테크 관장이던 앙리 랑글루와가 정부의 부당한 간섭에 의해 해고되고 사람들이 서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때, 혁명의 씨앗이 뿌려지던 그 지점에서 영화 <몽상가들>은 시작한다.


그들의 소통 방법, 대중문화와 성적 유희

카메라가 향하는 곳은 민중의 물결이 아니라 세 젊은이의 미묘한 동거 공간이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쌍둥이 남매인 이자벨과 테오, 미국인 매튜가 공유하는 독특한 소통 방법을 토대로 당시의 미숙했지만 순수했던 열정을 추억한다. 세 사람만의 공간, 그들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영화(또는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표현, 그리고 오르가즘이 없는 성적 유희다.

쌍둥이 남매와 매튜가 가까워진 원인은 영화다. 그들은 영화의 숏을 몸소 재연하면서 퀴즈를 내고 <이방인들>의 주인공을 따라 루브르 박물관을 가로지른다. 지미 핸드릭스와 에릭 크립튼에 관해 논쟁하며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의 연기를 놓고 토론한다. 대중문화를 말하는 것이 곧 세상과 소통하는 활로인 셈이다. 군데군데 배치된 걸작들의 숏이나 지미 핸드릭스의 연주 등 명곡의 삽입은 영화적 시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제 역할을 다한다.

베르톨루치는 세 청춘의 영화사랑을 통해 문화가 비로소 인간 의지의 영역으로 들어왔던 그 시절을 추억한다. 계급 재생산으로서의 일방적 헤게모니를 거부하던 시기, 대중문화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꿈틀대던 그 때, 문화는 곧 세상과 소통하는 기호였고 대중을 실천의 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몽상가들>이 보여주는 당대 문화의 매력적인 향연은 같은 ‘감정의 구조’를 누렸던 동시대 사람들에게 바치는 베르톨루치의 오마쥬에 다름 아니다.

세 젊음이 소통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성적 유희다. 그들은 영화퀴즈의 벌칙으로 자위나 성행위를 시도한다. 또한, 벌거벗고 돌아다니거나 성기를 노출한 채 장난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창피함이 없다. 오르가즘을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웃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욕조에서 몸을 맞대고 있는 그들은 같이 씻어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어린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마치 태초를 보는듯한 이 같은 성적 자유를 통해 영화는 쌍둥이 남매의 연결고리를 설명해낸다. 테오와 이자벨이 함께 잠을 청하는 방은 외부와 단절된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시킨다. 이미 성장해버린 육체와 상관없이, 쌍둥이의 정신은 여전히 자궁 안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채 같이 누워있는 기괴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당연히 섹스가 없다. 테오와 이자벨은 소중한 장소를 공유하는 ‘또 다른 나’로서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나체는 세상으로 나갈 날만을 설렌 마음으로 기다리는 태아의 그것에 가깝다.

베르톨루치는 테오와 이자벨의 이 같은 설렘을 ‘몽상’이라고 일컫는다. 자신들만의 사랑법을 향한 이 낙관적 믿음은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던, 그러기에 미숙했지만 열정적이었던 68년의 감성과 닮았다.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미묘한 동거 속에는 정점으로 달린 적이 없기에 한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던 당시의 순수했던 상상력이 스며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던 역동의 기운

노동자의 계급투쟁이나 혁명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그 시절의 분위기, 베루톨루치 감독이 ‘몽상가들’의 유희로 들어간 것은 바로 그 비어있는 의미를 다시 찾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테오와 이자벨 그리고 잠시였지만 매튜까지, 그들의 알몸에는 은밀함이 없다. 대중문화를 말하는 대화 속에는 순간순간의 감성이 살아 꿈틀거린다. 경계를 넘나드는 데 아무런 수줍음 없는 그들이지만 가치전복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세 청춘은 단지 좋아하는 것-문화, 서로의 몸-을 향유하고 즐길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적절히 어우러지며 일종의 카니발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리고 그 기운의 의미, 즉, ‘자유로운 상상력이 넘실거리던 한바탕 축제’가 68년의 기의로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시대는 완성된다. <몽상가들>은 오랫동안 68년의 혼돈과 정체성을 고민해온 노감독이 마침내 완성해낸 역사의 기록이자, 그 속에서 숨쉬었던 모든 몽상가들에게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몽상가들은 거리로 뛰쳐나간다. 이자벨과 테오가 자궁 밖으로 나오고 대중의 투쟁(이자 축제)이 현실과 부딪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매튜는 결국 쌍둥이 남매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 지점에서 베루톨루치 감독은 테오와 이자벨의 관계가 결국은 외부세계와 충돌하고 좌절하게 될 것임을 매튜의 슬픈 눈을 빌려 이야기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허무와 절망이 말해주듯, 순수한 감수성이 상처받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가 그 어느 때보다도 슬프게 들리는 이유다.

그러나 영화 <몽상가들>의 가치는 실패한 역사를 우울하게 되새김질하는 데 있지 않다. 베르톨루치의 자의식은 이미 반성과 후회, 절망을 겪을 만큼 겪었다. 어느덧 환갑을 넘긴 노감독이 선택한 길은 부러져버린 혁명의 깃발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역동적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며 그 시간을 수줍게 회고하는 것이다.

“탄원서가 시고, 시가 곧 탄원서다.” 테오와 이자벨, 그 시대의 몽상가들이 꿈꾸던 명제다. 베르톨루치는 거기에 한마디 덧붙인다. 결국 탄원서가 되지는 못했지만, 시는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고.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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