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영화의 매력은, 그 원천을 굳이 따지자면 인물들의 -지층적 행보에 있.

 

※ 이하 <기생충> 포함 봉준호 영화들의 스포일러

 

 

그 자유분방함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괴물>(2006)이다. <괴물>에서 강두와 괴물은 장르적 기승전결과 무관한 때 맞닥뜨림은 물론, 행동 패턴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복지부동의 공권력보다 날래고 유려하다. 영화 속 공간을 부감숏으로 따라간다면 이 둘의 발걸음은 아마 무규칙한 점들로 찍힐 것이다.

 

즉 영화 속 세계가 제시한 질서에 순응역행도 않는, 요컨대 떠돎같은 것. 떠돎의 운동은 낡은 질서의 후진성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인물들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2007)에서 주인공 수영은 모두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느라 옴짝달싹 못 할 때 홀로 걸어 다니는 경험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훗날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봉준호 영화에서는 이 떠돎이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같은 리듬으로 호흡하지 않는 무덤덤함이 돼 그 구조를 민망한 것으로 만들고는 한다. <지리멸렬>(1994)에서 위선자 3인이 TV 안에서 토론을 펼치는데, 그중 한 명 때문에 곤란을 겪었음에도 신문배달원은 TV 화면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토론이 토론으로서 가치 판단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모양.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렇게, 세속적 위계에 붙들리지 않음으로써 위계의 조악함을 발가벗겨버리는 지위를 종종 누려왔다.

 

봉준호의 단편 명작. <지리멸렬>

 

<마더>(2009)에 이르러 봉준호 감독은 인물들의 이 기존 경로를 마침내 구부러뜨린다. 앞선 주인공들은 위선적인 구조에 발목 잡히면서도 제 삶의 리듬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불합리한 구조를 괘념치 않는 유체적 속성 덕에 그 좌충우돌 행보는 차라리 상식에 가까웠다. 그러던 게 <마더>에서 도준 엄마가 관료적 시스템이 내린 눈먼 결론에 마침내 피로써 눈물로써 동의해버린 것이다.

 

살인 - 엄마…없어?” - 오열.

 

진범을 찾는다며 전작들의 인물과 흡사한 궤적을 그리던 이 엄마는 그렇게 다른 길로 접어든 후 꼭꼭 숨어버린다. 가난을 잡아먹은 가난()에게는 어떻게 눈에 안 띄고 살 것이냐가 관. <마더>의 끝부분을 송강호의 눈같은 호소하는 시선 대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덩어리진 음영이 장식하는 건, 필연과도 같았다.

 

서사적·미학적으로 완벽했던 <마더>의 엔딩 숏

 

이 같은 -지층적 행보가 실종된 것은 <설국열차>(2013) 때부터다. 인물들은 더 이상 떠돌지않았다. 영화 속 시스템에 순응또는 역행만 함으로써 운동성이 모종의 회로기판 안에 갇혀버린 형. 그래서 좌충우돌 질주는 해대지만 행보의 결 자체는 강자/약자의 논리 회로 위에 매끄럽게 정렬돼버린다. 시스템 안팎을 넘나들며 그 시스템이 얼마나 후졌는지를 전해오던 떠돎의 진동은, 이때부터 감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기생충>(2019)에 이르러 이 회로로의 수렴은 한층 더 강화됐다. 무신경하게 TV를 끄던 인물들의 자리는 공짜 와이파이를 찾고 세상에 접속하며 뉴스를 챙겨보는 이들이 차지했다. 상승/하강의 권역 바깥에서 행동의 나래를 펼칠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 그럴 수도 있겠지.”

 

유쾌하지 못한 느낌이 스멀스멀 번진 건 가족들의 사고방식 및 행보에 어떤 생략이 감지될 때부터다.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게 힘들고 구질구질한 것바퀴벌레스러운 침투력과 뻔뻔함을 납득하고 체화하는 것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는 문.

 

그래, 가난하네, 알겠는데, 그런데 이 가족은 왜 이러는데?

 

갑자기 분위기 연쇄사기꾼. <기생충>

 

그렇게 가난과 뻔뻔함이 점프 컷 수준으로 깨진 채 붙어있다 보니 반지하 창틀을 담은 숏들은, 마치 <버닝>(2018)의 햇빛 조각처럼, 어떤 편협한 시각에 잠식됐었다는 인상마저 남긴다. ‘여기서 매일매일 이런 프레임을 보고 살면 높은 확률로 뻔뻔함을 감당할 수 있게 되겠지’, ‘반지하서 이러고 살다 보면 부모고 자식이고 서로 듣는 데서 욕지거리도 할 듯’, ‘, 그러니 (나의) 코엔식 소동극을 위해 이제 트리거를 당겨봐따위의 잔향들.

 

그러니까 반지하방에서 실제로 그 프레임을 보며 눈 감고 떠본 적 없는 이가‘지층 살이 체험판’ 정도로 다소의 영감을 얻고는, 이를 (상 주는 사람들이 선호할 법한) 핏빛 소동극까지 적당히 끌고 간 게 다라는 결론, 말고 나는 무엇을 건질 수 있을까. 결국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행보의 반경 또한 예측 가능한데 여기에 논리의 비약마저 작동된 모양. 이제 후진 건 세계의 부조리한 질서 같은 게 아니라 각자도생하는 인물들, 그 자체가 됐다.

 

영화를 구성하는 유니크한 입자로서의 인물들, 부조리한 틈 하나를 파고드는 날카롭고 불온한 상상력,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봉준호 고유의 것들의 3연속 실종. 이래서는 이제 나는설레기가 어렵다.

 

 

물론, 이 글은 계획에 없었다. erazerh

 

밥은 먹고 다니냐. <기생충>

 

 

* 무슨 말이 구구절절 이렇게나 많은지 모르겠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케이크 위에 놓인 딸기 하나만으로도 그 깊은 여운을 남겼던 감독이.

 

* vs , 뭐 이런 말들 나오는데 이미 <마더>에서 을과 을의 싸움(?)은 그 연유와 결과와 비극성에서 정점을 찍은 바 있다. <기생충>의 가족들은 을보다는 을질에 가깝다.

 

* 팬티를, 거기서?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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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論: 구부러진 경로, 열림에서 닫힘으로



1. 시선의 향방


영화는, 본디 ‘시선’의 예술이다. 시선은 프레임 안팎에 분포하며 영화를 영화로 만든다. 일단 프레임 내부에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카메라의 시선이 ‘거기, 현실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카메라-시선은 이후에도 이미지들을 프레임에 들락거리게 함으로써 영화를 주관적인 체계로 엮어간다. 또한 배우들의 시선이 있다. 숏과 숏을 잇고 끊는 이 극중 눈길들은 대사와 더불어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주요 장치가 된다. 한편 이미지가 프레임 밖으로 나와 빛의 형태로 우리를 향하는 것, 이 역시 시선을 던지는 행위라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도 이에 반응, 프레임 쪽으로 눈길을 돌릴 테다. 데이비드 린치는 이를 가리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이를테면 내 눈이 아닌 타자의 그것으로 세상에 접속하기. 프레임과 관객 간의 이 부단한 시선 교환이야말로 영화관에서 일어나는 운동의 본질일 것이다.


여기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 프레임 안쪽 시선들이 프레임 밖으로 실시간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 스스로 밝히지 말 것. 배우의 눈이 카메라, 즉 객석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극중 인물이 카메라 너머 ‘당신, 관객’을 인지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순간, 어두컴컴하던 객석은 갑작스런 조명을 받은 양 민망한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훔쳐보기의 쾌락은 그 즉시 증발한다. 물론 이 규칙을 깨뜨리면서 그 틈으로 새로운 재미·구성을 들이미는 시도는 적지 않았다. 예컨대 포르노그래피 속 에로틱한 초대로서 여성의 시선이나, 부조리를 조명한 후에 관객을 증인으로 붙들려는 응시 같은 것.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는 아마도 후자의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무작정 도주하던 드와넬은 바닷가에 이르러 급기야 최종 시선을 카메라로 돌리는데, 끝이라는 자막(FIN)에도 불구하고 드와넬과 눈을 마주친 관객한테 이 장면은 끝이기가 어렵다. ‘세상 어디에도 이 소년이 갈 곳은 없습니다. 그렇다면…’에 이어지는 사유를 드와넬의 시선이 강력히 호소하는 까닭이다. 이렇듯 배우의 시선은 영화관 밖으로 이미지를 확장하려는 시도, 종종 그 첫 점이 되고는 한다.


봉준호 감독한테도 확장의 문제는 꽤나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그의 영화에는 장르적 틀로 가둘 수 없는 어떤 압축된 울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역시나 뻗어 나가려는 시선이 배치됐음은 당연지사. <플란다스의 개>(2000)의 마지막, 교수가 된 윤주는 강의 도중 창밖의 숲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마치 이를 이어받듯 클로징 크레디트 이후 숲 속의 현남은 손에 든 거울로 빛을 반사함과 동시에 관객을 바라본다. <살인의 추억>(2003)의 그 유명한 최종 숏에서는 두만이 기어이 카메라로 고개를 돌려 울컥하는 눈/얼굴을 비춘 바 있다. 그리고 <괴물>(2006)의 에필로그, 강두는 컨테이너의 작은 창을 통해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매섭게 노렸다. 이처럼 봉준호 영화의 끝에는 프레임 또는 창이라는 사각 틀을 넘어 관객의 영역이나 어떤 전경으로 꽂히는 시선이 늘 등장한다. 그에게 이미지란 스크린에 들러붙은 2차원의 평면이 아니라 상영 이후에 환기를 필요로 하는 일종의 입체적 소스인 셈이다. 물론 ‘개의 죽음 → 현서의 죽음’이 말해주듯, 소재는 점점 더 무거워져 갔다.


<마더>(2009)에 이르러 봉준호는 시선 처리의 도발 강도를 한층 더 높인다. 그것도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이름 모를 갈대밭, ‘국민엄마’가 느닷없이 춤 ― 이라기보다는 촌스런 몸짓 ― 을 시현하면 때마침 사운드 오버(sound over)로 음악 하나가 흐른다. 스크린 안과 밖에 자리했음에도 엄마의 몸동작과 음악은 서로 존재를 아는 양 한데 어울리는데, 힐끗힐끗 관객 쪽을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화면 외부 음악이 ‘붙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선에 붙들리는 건 비단 음악만이 아니다. 전작들과 달리 어떤 스토리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의 눈길이 흐르고 있음을 유의하자. 우리가 전달받는 건 의아함이 전부다. 따라서 여기서는 관객 쪽 정보가 새나가고 있다고 봐야 맞다. 국민엄마의 ‘모성 사투극’을 보러왔다는 기대(정보). 그러니까, 홀로, 갈대밭에서, 춤을 추는, 어쩌면 미쳤을, 중년의 여자, 그런데 국민엄마, 이 출처를 알 수 없는 기표들의 이상야릇한 조합이 한없이 포근하고 희생적인 기존의 성스러운 모성을 잡아먹는 꼴이다. 이는 환기가 아니라 흡입 또는 회수의 제스처다. 명백한 포르노그래피의 형식, 그러나 에로틱하지 않다. 아마도 봉준호는 이 장면을 찍으면서 정색을 지었으리라. 이제 그 이유를 말할 때가 됐다.


 


2. 정의사회 구현


인과관계가 명료한 죽음은 영화 내용상 ‘컷’ 효과를 내고는 한다. 그래서 한 챕터의 끝 또는 전체 내러티브의 완료 목전에서 종종 우리는 매끄럽게 다듬어진 죽음을 본다. 악당이 죽을 때는 주인공이 대변하는 선의 질서가 회복됐음을, 주인공의 죽음을 통해서는 들끓는 비장미를 만나는 식이다. 한편 이와는 다르게 내러티브 안에서 소화되지 않는 죽음, 이를테면 관객한테 정리의 몫이 떠넘겨지는 죽음들이 있다. <엘리펀트>(2003)에서 학생들이 몰살될 때가 꼭 그렇다. 이 영화에서 총기 난사 사건은 인과율이 완전히 배제된 채 돌발하는데, 그런 까닭으로 오직 화면 바깥에서만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수 있게 된다. <괴물>에서 희봉이 죽을 때는 어떤가. 괴물의 습격으로 희봉이 숨진 직후, 이어지는 숏에서 뉴스 앵커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라고 운을 뗀다. 그렇지만 곧바로 밝혀지는 사실, 앵커가 애도하고 있는 사람은 희봉이 아니라 미군 하사이다. 기표 간 연결 면에서 제때 도착했음에도 흐르는 정서를 툭 끊어버린다는 점에서 이 애도는 불연속적이다. ‘남루한 한 아버지의 주검’이라는 실재를 이토록 신속하게 치운 후에도, 봉준호는 디제시스(diegesis) 그 어디에도 공식적인 애도를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슬픔과 동시에 당혹감을 떠안는다.


비단 희봉만이 아니다. 봉준호 영화에 나오는 주검들이 대체로 이렇다.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이 사후에도 그들과 그 주위 사람들한테 담론적 지위는 요원하기만 하다. <괴물>에서도 강두는 딸 현서의 생존을 절절히 부르짖지만 그 목소리는 언어로 통용되지 못한다(“내 말도 말인데 왜! 왜 내 말을 안 들어!”). <살인의 추억>에서는 비 오는 날 지원 요청이 묵살되는 일이 벌어지는데, 우리도 잘 알다시피 그날 밤 또 한 여자가 살해당했다.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일사불란하게 오가는 시대에도 이처럼 어떤 말은 절박하거나 말거나 꺾이고 미끄러지다 끝내 묵언이 된다. 봉준호가 다룬 최초의 죽음은 시끄럽게 짖는다는 오해를 받아 아파트 지하실 장롱 속에 갇혀죽은, <플란다스의 개>의 성대가 거세된 개였다. 이후 죽음들은 어쩌면 이 목소리 박탈에 관한 동어반복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몰랐던 파트라슈들, 그 시체들의 가시화.


치를 떤 관객이라면 묻고 싶어질 것이다. 왜 세계는 그(녀)들을 부당하게 죽이는 것도 모자라 영혼조차 달래주지 않는지를. 사실 이런 유의 물음이야말로 봉준호가 가장 애타게 기다리던 질문이 아닐까? 그의 필모그래피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 답변을 드러내고 싶은 양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개는 죽여도 된다.’ 같은 개인 차원의 오만을<(플란다스의 개)>, 여자들이 죽는 건 못 막아도 그곳의 공장은 기어이 돌려야 했던 기괴한 시대적 강박으로 확장-체계화하는 식이다(<살인의 추억>). 나아가 거짓 혐의를 통해 획득되는 도시의 질서·침묵을 일종의 안전망이라 착각하는 <괴물> 속 세상에 이르면, 이 욕구들의 변천사는 보다 분명해진다. 피해자의 존재 자체를 불편해하는 위선 간 헤게모니적 결탁. 그리고 자연화되는 봉합, 즉 입막음. 봉준호 영화를 말할 때 흔히 동원되는 ‘무기력한 관료적 체계’는 바로 이 욕구들의 총체일 터. 그 구조가 정밀하게 묘사되면 될수록 구출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누누이 말해졌다. 한강의 기적을 보라고. 아파트, 농촌 같은 주거·생산의 상징은 한국 현대사의 자랑스러운 근간이라 자부돼왔다. 그러나 봉준호는 아무리 작은 구멍이라도 일단 음울한 기운이 흘러나오면 면 전체를 따고 들어가는 감독이다. 그 결과 우리는 다른 한강 ― 미군이 독극물을 방류했던 장소, 그러므로 강두와 괴물 같은 ‘바이러스’의 서식지 ― 을 본다. 오직 ‘기적’으로만 한강을 수식할 때, 그것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페르낭 브로델은 한 역사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역사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장기지속 이론을 발전시켰다. 마찬가지로 봉준호의 영화에는 그 배제에 반발한 발굴, 또한 폭로가 있다. 이를테면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간판을 자랑스럽게 내건 그곳이 실은 여자들이 죽은 땅이었다는 역설. 이윽고 ‘짝퉁’으로서의 평화적 구조가 발가벗겨지면, 송강호의 마지막 눈빛,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관통하는 그 서늘한 응시를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3. 구부러진 경로: 상식의 유무


희봉의 죽음 직후 뉴스에서 보듯, TV는 가공 이미지의 대량 방출로 실재를 무력화시키는 시뮬라시옹(simulation)-기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TV를 끄는 장면은 봉준호 영화에 곧잘 등장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 TV를 끄는 이 중 어느 누구도 그 내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는다. <지리멸렬>(1994)에서는 위선자 3인이 토론을 펼치는데, 그중 한 명 때문에 곤란을 겪었음에도 신문배달원은 화면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살인의 추억>에서 용구가 TV를 부수기는 하지만 그건 그 내용과 무관한 분노 탓이었다. <괴물>의 에피소드가 가장 심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강두는 현서를 잃었음에도 TV의 계속되는 거짓말에 분노하기는커녕 반응조차 하지 않다가 밥 먹는데 시끄럽다는 이유로 TV를 끈다. 자신의 인터뷰를 빠뜨렸다는 까닭으로 9시 뉴스에 실망하는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 정도가 화가 났다면 났을까. 이는 따지자면 지나치게 이율배반적이다. TV는 억지 봉합을 위한 거짓말로 철철 넘치는데, 정작 그 봉합의 피해자들은 억울함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부조리를 방관하는 현실 속 정치적 무관심이 극적인 냉소로 포장됐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그러나 이 무심한 태도가 등장인물들을 시스템에 의해 버려진 부품으로만 전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봉준호의 어떤 의지 표명으로 보면 어떨까? 요컨대 시련 통과를 위한 탈정치. 개인의 위치를 제멋대로 지정하는 수직-체계, 그 얼굴로서의 TV를 무시함으로써 인물들이 체제에 예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객체의 운명에서 건져지면, 인물들은 부딪치고 실패하고 각성하는 흐름의 출처를 한결 자연스레 자기 본연에 둘 수 있다. <괴물>은 그 자유분방한 행보가 가장 두드러지는 경우다. 강두와 괴물은 장르적 기승전결과 무관한 때에 맞닥뜨림은 물론, 행동 패턴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복지부동의 공권력보다 날래다. 영화 속 공간을 부감숏으로 따라간다면 이 둘의 발걸음은 아마 무규칙한 점들로 찍힐 것이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몸체’로서의 분포도. 그 점들 각각은 시간-이미지임은 물론이거니와, 세속적인 위계에 붙들리지 않는다는 면에서 유령-이미지이기도 하다. <별빛 속으로>(2007)의 주인공 수영은 모두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느라 옴짝달싹 못할 때 홀로 걷는 경험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훗날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봉준호의 인물들은 바로 텔레비전의 OFF 버튼을 누름으로써 그 탈지층의 문을 연다. 들뢰즈에 따르자면 이는 고체의 역학에서 유체의 역학으로의 이동이지 결코 포기가 아니다. “왼발은 코미디, 오른발은 비극”이라는 선언은, 그렇게 자유롭게 노닐라는 봉준호의 장르적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마더>다. 아들이 살인자로 몰리자 그 엄마가 직접 진범을 찾아 나선다는 기(起)와 승(承). 다시 한 번 자식의 부재 모티프다. <괴물>에서 희봉은 이야기한다. “새끼 잃은 부모의 썩어 문드러진 속 냄새는 십 리 밖까지 진동한다.”고. 그 썩은 내를 십 리는 물론 프레임 너머까지 풀풀 풍긴 것이 <괴물>이라면, <마더>는 냄새를 퍼뜨리다가 진동 직전에 도로 빨아들인다. 봉준호 영화 최초로 ‘사투’가 구출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말로 누군가를 죽인(死) 싸움(鬪).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내 아들 ≠ 살인자’라는 대전제가 붕괴되자 도준 엄마는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물상 노인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는 한편, 다른 이에게 아들의 혐의가 전가되는 걸 묵인하기까지 한다. 이 지점에서 <마더>는 전작들과 고별한다. 앞선 주인공들은 위선적인 구조에 발목 잡히면서도 삶의 리듬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불합리한 구조를 괘념치 않는 유체적 속성 덕에 그 좌충우돌 행보는 차라리 상식에 가까웠다. 그런데 도준 엄마가 관료적 시스템이 내린 눈먼 결론에 피로써 눈물로써 동의한 것이다. 전작들의 인물과 흡사한 궤적을 그리던 이 엄마는 그렇게 다른 길로 접어든 후 꼭꼭 숨어버린다. 실패라는 결말을 통해 관객한테 각성을 촉구했던 이전 경로가 휘어진 꼴. 우리는 마침내 주인공의 성공을 목격하지만 그건 이미 상식이 무너진 뒤의 일이다. 부조리는 엄마마저 삼켰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일단 <마더>에는 ‘현서의 생존’과 같은 명징한 사실이 애초에 없었음을 상기하자. 살인자 자리는 비워져 있었고, 그 자리의 주인으로 지목받은 것이 도준이며, 그 도준의 엄마가 주인공인 이야기. 영화는 ‘무고한 도준’이라는 믿음을 위해 엄마의 억척스러움을 과용하다가, 갑자기 안면을 바꿔 ‘믿음 → 실제’를 거짓으로 결론 내리고는 엄마의 노선마저 급박하게 구부린다. 결과적으로 볼 때 도준은 지적장애 탓에 사람을 죽였고, 이 장애는 엄마의 동반자살 시도로부터 왔으므로, 엄마에서부터 돌고 돌던 스토리는 결국 엄마한테 와서 멈춘 셈이다. 프레임 너머의 살인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대신 프레임 안쪽 깊숙한 곳에 살인자를 꼭꼭 감춰두는 형국. 봉준호는 ‘쌀떡녀’ 아정의 엄마 자리에 얼마든지 김혜자를 데려다 놓을 수 있었다. 전작들 같으면 그렇게 한 후 살인자를 찾게끔 했을 것이다. 한데 그러지 않았다. 왜일까. 도준 엄마 자격으로 도준과 아정의 만남을 지켜보도록 해야 했던, 어떤 연유라도 있는 걸까.

 

 


4. 두 개의 구멍


블랙홀은 물질은 물론 빛까지 모조리 빨아들여 삼킨다.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장소. 봉준호 영화에는 시체와 살인자 단 둘만 아는 ‘검은 구멍’이 꼭 등장한다. 지하실, 하수구 등 <마더> 이전에 그 구멍은 부지불식간에 빠져버리는 그야말로 블랙홀에 가까웠다. 상징계의 룰을 괘념치 않는 주인공들에게 시스템 외부 어딘가에 파인 괴물적 구멍은 보다 더 갑작스럽고 불확실한 것이었다. 반면 <마더>의 구멍‘들’은 은밀하되 마을과 역사를 함께 하는 어떤 유서 깊은 동굴과도 같다. 두 여자의 서식 환경이 환유되는 장소인데다 마을 사람 다수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식적인 상상일지 몰라도 이는 결국 여성 신체의 명백한 확대 구현이다. 돌려 말할 필요 없이, 두 개의 질. 먼저 아정과 도준이 만난 검은 골목길 입구, 그 안쪽은 마을 남자들의 원초적 욕구가 물심양면으로 부담 없이 해소되는 몸, 즉 아정의 질 내부 형상이라 볼 수 있다. 이 소녀 가장을 죽인 실체는 바로 그녀를 밤마다 그곳에 불러낸 힘, 굶지 않으려면 몸을 바치라는 마을의 암묵적 명령일 테고. 봉준호는 이례적으로 골목 속이 아닌 옥상에 시체를 걸쳐두는데, 그것이 과시든 구조 요청이든, 자꾸만 떠벌이고 싶은 우스꽝스런 기표 ‘쌀떡녀’만이 아정에게 허락된 유일한 ‘명찰’이기 때문이리라.


한편 도준 엄마의 어두침침한 약방은 아들을 배출한 후 용도 폐기된 과거적 공간, 이를테면 늙은 홀어미의 거칠고 메마른 질처럼 보인다. 가부장제 내 홀어미는 아들을 가부장으로 키워냈을 때 비로소 구성원의 지위를 부여받는 법. 하지만 <마더>의 아들 도준은 지능이 떨어지는 탓에 남자로 성장하기는커녕 일상생활조차 엄마 없이는 여의치 않다. 그래서일까. 도준을 향한 엄마의 시선이 약방 밖으로 뻗을 때면, 가뜩이나 좁은 약방 입구는 온갖 히스테리를 머금고 부르르 떠는, 곧 비명을 쏟아낼 입 같기도 하다. 한편 근친상간의 뉘앙스는 도준의 남성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불쌍한 내 새끼’라는 기표를 불쑥 뚫고 튀어나온, 원초적 리비도의 발현처럼 느껴진다. 엄마와 진태가 함께 잤을지도 모를 불온한 징후 또한 마찬가지. 도준과 정반대인 ‘남자’ 진태야말로 마을 공동체 편입에 마침맞은 캐릭터 아닌가. 아들로서도 내 남자로서도 만점이다. 이처럼 <마더>에 이르러 봉준호의 검은 구멍은 가부정적 상징계 언저리에 파내려진 일종의 서식지로 구체화된다. 남근의 지침을 면면히 따르도록 마련된 공공연한 비밀의 장소. 적어도 봉준호한테 가난한 여성성의 복무란,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비열하고 잔혹한 것이다.


이제 중요한 건 두 여자의 만남, 그리고 그 이후다. 먼저, 검은 골목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도준과 들어가야 하는 아정의 조우. 도준이 “남자가 싫으냐?”고 묻자 아정은 “너 나 알아? 바보 같은 새끼.”로 응한다. 푸념이 분노를 돋우고 그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불러 결국 죽음으로 되돌아오는 상황. 골목 입구에 드리운 시커먼 그림자는 말의 진의를 모두 삼켜버리는 기괴한 장막처럼 보인다. 아정과 평행선을 긋고 있던 엄마의 삶은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굴절, 아정의 영역에 접속한다. 그러나 거기 놓인 건 동반자살 시도가 남긴 자국들의 종합일 뿐이다. 모자란 아들, 그러므로 “무시하면?” “작살낸다.” “한 대 치면?” “두 대 깐다.”라는 반복 교육, 그리고 눈앞에 놓인 비극적 귀결. 이렇듯 원죄는 일상 곳곳에 잠재돼 있다가 뜻하지 않은 결과로 돌출, 엄마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고는 한다. 아정과 만났던 밤을 기억하기 위해 관자놀이를 돌리던 도준이 돌연 엄마의 동반자살 시도를 떠올리며 5살 때 고통을 복기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마땅히 도준 엄마에게 이 같은 경험은 처음도 끝도 아닐 것이다. <마더>에는 도준 엄마만 놓인 롱숏, 그것도 내러티브를 추동하지 못한 채 단지 인상적 잔상으로 남을 이미지가 유독 많다. 진태를 범인으로 의심한 도준 엄마가 그의 집으로 가고 올 때의 익스트림 롱숏 두 개가 특히 그렇다. 이 숏들을 들어내더라도 엄마의 추적/실패를 보여주는 데 무리는 없다. 앞뒤 맥락의 징검다리가 될 수 없다면 그 장면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의 경우 산수화 같은 거대한 풍광 앞에 엄마를 보잘것없는 점으로 놓은 구도 탓에, 우리는 ‘압도돼, 갇힌, 쓸쓸한, 엄마’라는 풍경-인물화를 본다. 아마도 목표의 불가능성과 그 자기 원인 탓에 영영 맴돌아야 할 심리적 영토, 그것의 회화화, 즉 ‘반쯤 미침’의 이미지일 테다.


“저건 포플러나무가 아니다 / 팽개쳐 일그러진 두 바퀴 / 소리치는 몸뚱이 / 저건 저건 내리치는 검은 칼” 최정례 시인의 『창』 그 마지막 연이다. 여기서 나뭇잎을 칼로 만드는 주체는 화자, 그녀의 마음이다. 도준 엄마라고 다를까. 봉준호는 이런 그녀를 위해 ‘침’이라는 특단의 기구를 마련해 두었다. 파토스(pathos)를 맞이하는, 엄마만의 미토스(mythos). 그녀는 영영 이성의 영역으로 돌아오지 못할(않을) 것이다.


도준이 애초에 용의자로 지목된 까닭은 그가 진범이라서가 아니라 가난한 어미를 둔, 아비 없는 동네 바보이기 때문이다. 그 ‘보잘것없음’이 증거를 증거로 굳힌다. 그리고 종팔이, 도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그 비극의 주연 또한 동일한 원리로 소환됐음은 물론이다. 영화 후반부, 도준과 종팔은 각각 한 차례씩 얼굴/몸의 형체가 지워진 채 흐릿하게 등장한다. 세계 안에 이 둘한테 맞을 초점 따위는 영영 없을 것만 같다. 그저 존재할 뿐인 비인칭의 ‘그것들’은, 그러나 백광호와 박강두에게 혐의를 씌운 그 무능한 공권력이 다시 한 번 작동하는 순간 ‘괴물’로서 세상에 공개된다. 둘 중 더 징그러운 녀석은 누구일까. 봉준호는 그 잔혹한 퀴즈의 장(場)에 기어이 도준 엄마를 불러 앉힌다. 거울을 통해 도준 엄마와 종팔을 겹겹이 가두는 숏, 엄마는 울고 종팔은 밖으로 사라진다. 이제 어느 누구도 종팔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서열의 맨 끝에 자리한 이 가여운 친구에게는, 밥상을 차려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으므로. 이로써 ‘양육의 약육강식전’은 막을 내린다. 국민엄마한테서 ‘국민’ 딱지가 떨어졌다.

 


끌로드 샤브롤은 자신의 영화 <의식>(1995)의 마지막 정지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소멸만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피와 잔느의 돌발 행동은 단지 일회적일 뿐이며 계급투쟁 나아가 전복은 결코 현시될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 <의식>의 이 마지막 숏을 명멸하는 (자질구레한) 사건들에서 임의로 추출한 스틸(still)이라 본다면, <마더>는 그 생성/소멸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에 관한 대한민국형 알레고리다. 거슬러 올라가보자. 동반자살은 어디서 왔는가. 엄마는 말한다.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너랑 나랑 같이 죽으려고….” 요컨대 남편·아버지 없는 가난한 모자의 고되고 암울한 삶, 생계. 거기서 비롯된 불운한 인과적 계보를 잇기에 종팔만큼 최적화된 모델이 또 있을까. 이처럼 <마더>에서 불운한 자들의 에너지는 끼리끼리 주고받아져 그 안에서 맴돌 뿐 절대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다. 제 아무리 들끓을지언정 세계 전체를 놓고 볼 때는 미동들의 초라한 발생과 소멸만이 있을 뿐이다. 봉준호는 ‘부조리가 자연화된 관료적 세계’를 큰 틀로 유지한 채, 가부장제 속 ‘가난한 어미’로 하여금 동류를 저버리고 그 틀에 숨도록 만듦으로써, 그 미동의 구체적 정황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전작들에서 다른 곳을 향하던 두 계층이 한 곳을 보며 겹쳐진 꼴이다. 그러니까 종으로 떨어트려진 자들이 횡으로는 서로를 폐기하는, 아래로의 분류만을 영속할 메커니즘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에 관한 영화적 설명. 물론 종팔의 사례에서 보듯 태생이 비천할수록 폐기될 가능성은 더 크다.


<마더>의 클로징 시퀀스. 버스에 오른 도준 엄마가 머뭇거리기를 잠시, 자신의 허벅지에 침을 놓는다. 이어지는 침묵의 카운트다운. 5, 4, 3, 2, 1. 심장이 새로 뛰는 듯한 사운드가 흐르고 도준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춘다. 슬슬 다른 사람들과 뒤섞이는 그녀, 무리와 구분되지 않겠다 싶더니 이내 그들과 한 몸이 된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렇게 한국 아줌마 특유의 카니발, 관광버스 춤이 남는다. 모두가 비밀 한 가지쯤은 간직하고 있어서일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들은 오직 역광을 받는 하나의 덩어리로만 포착 가능하다. 신명나는 몸짓과 쓸쓸한 질감의 묘한 조화, 망각의 제의(祭儀). 인상주의 회화의 마법적 기술을 활용한 이 숏에서, 봉준호는 도준 엄마를 비롯한 그 누구의 눈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가난을 잡아먹은 가난(들)은 이렇게 ‘페이드아웃’(fade-out) 한다.

 

 


5. 오인의 실체


봉준호 영화는 종종 ‘오인’의 코드로 읽힌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늘 언급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필모그래피가 거듭될수록 오인이 점점 더 악랄해진다는 것. <플란다스의 개>에서 윤주가 개를 착각한 이유는 동물학대를 떠나 단지 무신경해서였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두만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들이는데, 그건 그가 정말로 “얼굴을 보다 보면 감이 딱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대적 공기 자체에 내포된 오인들이 더 문제였다. <괴물>에 이르러 오인은 프로젝트성 ― 수직-폐쇄적 질서를 위한 전략적인 도구 ― 으로 비약까지 했다. 그렇다면 왜 봉준호는 자꾸만 오인의 강도를 높이는 걸까. 일단 나는 ‘향숙이’라는 기표를 소비하던 우리 방식에 심각한 윤리적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낱 농지거리로 둔갑시키고 실컷 킥킥대고 버려도 좋을 만큼 그 이름이 덜 비극적인 것이었나, 하는 문제. 이때 <괴물>이 언급한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은 누구인가. 아울러 <괴물>을 가리켜 ‘미국 비판은 나오는데 반미(反美) 영화는 아니다.’라고 애써 우겼던 역시나 둔해빠진 우리는, 후에 어떤 정부를 탄생시켰나.


봉준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테다. 현실 속 오인을 영화로써 보여줬건만 우리는 그걸 반성하기보다 기표 하나를 골라 선정적으로 만지작거리는 데 그쳤고, 봉준호는 그 같은 현상을 오인의 양식으로 다시 영화화, <마더>를 내놓았다. 그러니까 한 어미가 진실을 망각하게 되는 이 모든 이야기의 출처는 망각이라는 결과를 앞서 생산했던 바로 우리인 셈이다. 봉준호는 그걸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뿐이고. 이는 한결같은 주관으로 현실을 꾸준히 재단하는 정통적 작가로서의 행보가 아니라 현실의 실체에 따라 주관을 부단히 ‘새로 고침’하는 보다 예측 불가능한 걸음이다. ‘송강호의 눈’ 같은 호소하는 시선 대신 덩어리진 음영이 <마더>의 끝부분을 장식한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응시하는 눈이 없다고 해서 남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친절하게 도식화된 사유 거리 대신 이 영화에는 절규를 삼켜야 하는 몸들의 연쇄가 있다. 살해된 아정, 눈을 질끈 감은 엄마, 그리고 ‘추악하고도 화창한 날’ 폐기된 종팔. 여기서 봉준호의 질문. 종팔이는 대체 누구를 대신해 감옥에 있는 걸까요. 도준? 아직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까.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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