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이 모양인 것과 비대칭 오컬트에 관해

 

 

※ 영화 <곡성>과 <랑종>의 내용이 일부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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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까운 가족이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인데 죽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과거 나홍진 감독은 영화 <곡성>(2016)을 만든 동기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요컨대 ‘왜 착한 사람이 불행한 일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추론 또는 상상.

 

2. 흔히들 한탄한다. 신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선한 사람들의 억울함이 반복되냐고. <곡성>은 이 불가해를 이해하고자 비이성의 경로를 택한 영화다. 방법은 소거법. 첫 번째 세부 질문 ‘신은 있는가? 없는가’에서는 부재(不在)를 지우고 존재(存在)를 남긴다. 그렇게 이 영화에는 초월자가 ‘있’게 된다. 아무렴.

3.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신은 영향력을 행사했는가? 혹은 놀았는가’ 정도 되겠다. 다시 말하지만 나홍진은 지금 한 손엔 카메라, 다른 한 손엔 부적 비슷한 걸 쥐고 있다. 비이성이라는 어질어질 외길. 그렇게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소거되고 ‘영향력을 충분히 행사했다’가 남는다.

4. 이제 신이 ①존재하고 ②액션도 취했는데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왜 착한 종구 가족이 몰살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필연이다. 이 지점에서, 선택 가능한 답지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라며 나홍진이 고개를 홱 180도 돌려 관객을 본다.(물론 실제가 아니고 영화의 태도에 관한 은유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신은, 그 신이 아니었습니다. 낄낄낄, 와타시와 와타시다, 나는 나다. <곡성>에서 넘버원 초월자의 정체는 ③재앙을 빚는 악(惡)이었던 것. ‘귀신’ 신(神)은 결코 직무를 유기한 적이 없다. 애석하게도.

 

악마를 보았다. <곡성>


5. 1선발 초월자라면 당연히 거룩하고 선하리라는 믿음은 <곡성>에서 구겨졌다. 그리고 5년, <랑종>(2021)이 그 세계관을 장착한 채 또 다른 극한으로 내달린다. 이번에도 초월적인 무언가는 모두가 멸망할 때까지 폭주한다.(나홍진의 날인) 게다가 한두 놈이 아닌 듯하다.

6. 이 귀‘신’들을 <엑소시스트>나 <컨저링> 같은 정통 오컬트 속 대립 구도, 이를테면 적그리스도로서의 대항마 계보 안에 넣기는 어렵다. 그들처럼 선(善)이 구축한 팽팽한 질서를 따고 들어와 균열을 내는 등의 목적성을 띠지 않으니까. 왜? 안 그래도 되므로. 미안하지만 <랑종>에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게 만들 법한 절대 선, 시스템의 창조자, 친인류적 초월자 등 그게 무엇이든 비슷한 것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무당인 님도 끝내 털어놓지 않았나. 신내림을 받았지만 진짜로 신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7. <곡성>과 달리 <랑종>은 현혹되지 말기를 바라는 선한 성질의 기운마저 제거했다.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무당 몸을 빌린 수호신이든, 공포에 벌벌 떠는 인간들에게 가호를 내려줄 이는 없다. 좋은 초월자는 꼭꼭 숨었거나 모든 초월자는 나쁘거나. <곡성>이 신의 가면을 벗겨 그 악의(惡意)로 가득한 얼굴을 봤다면, <랑종>은 악의의 운동능력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괜히 모큐멘터리 형식을 취한 게 아니다.

8. 악의 증폭과 선이라 믿어진 것들의 부재. 억울함과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 짓뭉개졌을 인간의 비극사, 까지 안 가도 포털 뉴스 사회면을 하루만 들여다보자. 현실 세계를 오컬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랑종>의 이 궤멸적 신화보다 어울리는 콘텐츠가 있겠나 싶다.

궤멸적 신화. <랑종>


9. 악마한테 이기든 지든, 선악 대칭 구조를 가진 주류 오컬트는 창조자나 창조자가 빛은 질서의 선의와 안전성을 여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면 <더 위치>, <곡성>, <유전>, <랑종> 등 특정 힘에 압도되는 비대칭 호러들이 있다. 현혹되지 말자. 이 계보의 영화들은 지금 악에 들뜬 상태가 아니라, ‘악’밖에 남지 않은 실재를 도식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구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0. 이 모든 영화적 상상은 불우하고 불공평한 세계를 납득하기 위한, 차라리 가장 합리적인 접근일지도 모르겠다. 비이성의 중심에서 외치는 이성. 그렇게 원형으로서의 신은 죽었다. 다만 그럴수록 더욱 절통한 어떤 현실들. 다시, 신이시여. ⓒ erazerh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곡성]에서 [랑종]까지 - 신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세상이 이 모양인 것과 비대칭 오컬트에 관해 | ※ 영화 <곡성>과 <랑종>의 내용이 일부 드러납니다. :) 1. “가까운 가족이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인데 죽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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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여정으로 보는 원초적 공포

 

 

※ 영화 <라이트하우스>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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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에서 공포는 주로 어떻게오는가. 우선 어제와 다른 오늘, 익숙한 시공간에 금이 가고 그 틈으로 괴물 또는 괴이한 무언가가 스며들겠지. 가족과 친구들, 주인공의 미래가 그것들에 갉아 먹혀갈 때 공포영화는 그 상황과 괴물을 공포의 근원으로 삼을 터.

 

이때 공포감의 운동성은 의 움직임과 닮았다. 평온의 막을 베고 침투해서는 난도질, 그러다 훅, 관객의 영역까지 찌르는 모양새.

 

물론 이 물리적 흐름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화들은 있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라이트하우스>(2019)도 그중 하나. 이 영화에는 침입, 침투, 그 무엇이든 쳐들어와 헤집는 운동성이 없다. 일상과 비일상 간 대조도, 공포의 제작 및 전달자도 부재하다. 그럼에도 국내외 영화 소개 페이지들은 이 작품을 호러로 분류 중. 실제로 제법 무시무시하다. 공포 전달용 일반 회로가 장착되지는 않았지만 무섭다는 말, 이 공포감의 정체는 뭘까?

 

본 적 없는 판타지-호러. <라이트하우스>

 

 

# 욕망과 욕망의 오디세이아

 

흑백으로 촬영된 <라이트하우스>20세기 초반의 두 등대지기, ‘고참토마스 웨이크(윌렘 대포)신참에프라임 윈슬로(로버트 패틴슨)에 관한 이야기다. 에프라임은 등대 불빛을 교대로 관리하길 바라지만 토마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한 채 불빛을 독차지한다. 두 남자, 억누름과 밀어올림.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영화 중간의 짧은 숏 하나, 거꾸로 보이는 등대가 화면이 뒤집히면서 바로 선다. 이를테면 발기하는 페니스. 실제로 로버트 에거스는 여기다 진짜 페니스를 찍어 붙이려 했으나 무산됐다고 한다. 다시 ’, ‘남자임을 떠올리자. 그러니까 <라이트하우스>는 발기된 두 개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외부 침입보다는 서로 간 경합이 어울릴 듯하다.

 

욕망은 둘인데 탐할 수 있는 실체적 대상, 즉 등대 불빛은 하나인 상황. 영화는 주로 욕구불만인 에프라임의 의식 흐름을 좇는다. 훔쳐보기는 수순일까. 그는 등대 불빛 칸에서 토마스가 인어인지 거대 촉수인지 모를 무언가와 교미비슷한 것을 하는 걸 보고, 자신을 대입시키고, 분출하고, 분노한다. 이런 식이다. , 경험 없는 상상은 결핍을 키우기 마련. 욕망은 끝내 해소돼야 한다. 어떻게? 나를 가로막는 토마스를 없애서라도.

 

욕망 vs 욕망. <라이트하우스>

 

애초에 이럴 운명이기는 했다. 이 등대섬은 그러라고 장만된 무대 같다. 폭풍우는 멈출 기미가 없으며 교대팀의 배는 오지 않는다. 고립은, 공간 감각은 물론 시간 경과에 대한 인식마저 도려낸다. 며칠 혹은 몇 주가 흘렀는지 시간적 배경을 그들도 관객도 모를 지경. 게다가 각자 과거의 고백과 의심이 뒤섞여 두 사람의 정체성마저 뭉개졌다. 에프라임의 욕구 불만족과 토마스의 수호 의지만이, 이 우주를 통틀어 남은 유이한 키워드인 것 같다.

 

이때 토마스는 누구인가?’

 

토마스는 해독 불가한 모종의 구전 신화를 읊는 등 무언가에 홀린 듯하면서도, 일이 느리고 게으르다며 에프라임을 구박하고 말대꾸 시 급여를 안 주겠노라 협박까지 한다. 원시성과 현실성을 두루 갖춘 억압. 말은 안 통하는데 위협은 실재적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누구나 한 번은 겪()을 폭압적 부모, 스승, 선배, 상사, 또는 그 비슷한 무엇들. 안타깝게도 이 토마스은 특정한 마법으로 소환된 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 우리,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 그렇듯.

 

두 욕망의 역학관계상 나중 것에 의한 전복은 필연이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에프라임은 마침내 등대 불빛을 오롯이 향유한다. 결과는? 그는 불빛을 보며 쾌락인지 고통인지 모를 표정으로 산화하듯 절규하다가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아마도 죽겠지. 불빛의 정체와 그 순간의 감정은 영영 알 수 없게 됐다.

 

등대 불빛과의 조우. <라이트하우스>

 

 

# ‘현타(현실 자각 타임)’와 ‘죽음’, 언제나 참

 

결자해지의 의지일까. 로버트 에거스 감독은 여기다 최종 숏을 붙임으로써 이 등대 치정극의 장르는 규정 지어준다. 바로 눈 하나를 잃은 알몸의 에프라임이 바닷가에 널브러져 죽어 가면, 갈매기가 그의 내장을 뜯어먹는 숏. 이때의 에프라임은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한테 전해줬다가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된 프로메테우스와 노골적으로 닮았다. 이를테면 ‘신화’로 박제된 ‘소멸’의 엔딩. 왜? 에프라임이 욕망했기 때문에. 오르가즘은 태생적으로 증발하는 것 아니던가. 거 ‘현타’ 한번 오지다.

 

한걸음 더. 욕망의 카테고리 중 가장 큰 것은 의 지속, 즉 생()에의 의지다. 이렇게 보면 증발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요 기다리는 건 죽음이 된다. 선점자인 토마스도, 후발주자인 에프라임도 모두 죽었다. 쾌락이든 목숨이든 일단 점유한 자들은 길게 머무를 수 없다. <라이트하우스>에서 공포란, 곧 소멸할 쾌락을 좇도록 디자인된 우리의 방향성,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의 너머에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 셈이다.

 

이 정도로 근원적인 공포감이 기존 호러영화들의 운동성을 짜잔, 두르기란 어렵다. 보다 날-공포인 만큼 그 성질에 대한 힌트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찾아야 한다. 날것, 태초그렇게 인류의 출현부터 먼 미래까지를 꿰어버린 영화로 가보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이 걸작 SF를 꺼내든 건 이 영화에 인류사를 유인원 시절부터 촉발시켜온 검은 돌기둥 모노리스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색이 입혀지기 전부터 우리 생을 운용했을, 절대적 배후 같은 물질. ‘증발소멸’, ‘죽음따위의 <라이트하우스>적 공포는 바로 이 영험한 유물에 새겨진 지침처럼 존재한다. 애초에 운동성을 띨 필요가 없었던 것. 가라사대, 침투하지 않아도 그저 기다리면 인간들이 도착하리니. 공포계에 짜라투스트라가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라이트하우스>의 최종 숏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

 

 

# 이보다 선명한 미래는 없다

 

로버트 에거스는 장편 데뷔작 <더 위치>(2016)에서 마녀를 공포감의 근원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선택되는 모종의 출구로 다뤘다. 무서운 건 모든 걸 왜곡하는 렌즈, 즉 인식 불능에 빠진 맹신의 시대였다. 그리고 <라이트하우스>에서는 비율 1.19:1의 흑백 프레임에다 소멸론을 인류의 기원신화인 양 보존해놨다.

 

말로 옮기자면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정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욕망하고 살아가는 우리 앞에, ‘현타죽음보다 선명한 미래가 또 있을까? erazerh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현타’보다 선명한 미래는 없다

[라이트하우스] 욕망의 여정으로 보는 원초적 공포 | ※ 영화 <라이트하우스>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공포영화에서 공포는 주로 ‘어떻게’ 오는가. 우선 어제와 다른 오늘, 익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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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카메라는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카메라는 부분을 연주하고 즉흥적으로 소리를 낼 수도 있고 직접 개입할 수도 있는 악기와 같다. 두 번째로 카메라는 복싱과 같다. 카메라로 힘껏 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애무와 같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존재들과 사물들의 표면을 스쳐가는 작은 움직임들이기 때문이다.

(중략) 어렸을 적에 끈으로 단단하게 신발에 잘 묶어서 신는 나무 스케이트가 있었다. 내가 스케이트를 잘 타게 되었을 때,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스케이트가 발아래서 거의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카메라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나는 카메라를 그저 내버려둔다. 초점을 맞추는 데도 전보다 아주 많이 편안해져서, 한순간 이미지를 흐릿하게 내버려두고, 다음에 아주 부드럽게 다시 잡는다. 그러면 마치 카메라가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카메라 위로 사물들의 리듬이 다가오게 된다."


- 요한 반 데르 코이켄, [시선의 모험] 中


좋은 영화의 기준 중 하나로, '허구와 현실 간 원활한 호흡'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프레임 안에서 바깥으로, 또는 바깥에서 안으로의 자유로운 운동성 같은 것. 여기서 프레임 안은 영화 이미지 자체를 말하며, 프레임 바깥은 우리가 극장 밖에서 만나는 실제 세계, 즉 카메라가 마주하고 있었을 그때 그 시공간을 뜻한다. 요컨대 관건은 시공간에 놓인 어떤 리듬, 육안으로 감지하기 힘든 사물들의 심상을 카메라가 포착해내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이 가능할 때만 영화의 안과 밖이 진정어린 대화를 나눌만 한 거리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카메라를 일컬어 '살아있는 기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근래 내게 가장 와 닿았던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라스트 데이즈>와 프랑수아 오종의 <타임 투 리브>와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었다).

글, 이를테면 영화평도 다르지 않다. 영화 또는 영화가 건진 현실을 글의 맥락에 얼마나 잘 녹여내느냐 하는 것. 한 편의 영화를 현실의 어떤 지점에 관한 고유한 '신호'라고 해보자. '그 신호 체계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와 더불어 해당 현실을 향한 글쓴이의 진심이 담긴 글' 정도를, 우리는 좋은 영화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지식이 아니라 정성과 열정이다. 글을 쓰는 데 정성이나 열정만큼 강력한 에너지원이 없을 뿐더러 그것이 결여된 글은 읽는 이에게 고문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뜬금없기는 하지만, 내가 비교적 최근에 쓴 몇몇 멍청한 글들에 그 정성과 열정이 빠져있음을 반성하기 위함이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글의 어떤 부분은 민망함을 넘어 다소 역겹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글도 마음에 안 든다. 거참.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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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평론계' 나아가 '충무로'를 향한 비난의 화살은 영화 개봉 전부터 날아왔다. 시사회에 참석한 평론가나 기자의 비판 글이 올라오던 그때부터. 대개 영화의 짜임새를 문제 삼은 그 글들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반박의 논리는 "이 영화에서 그런 걸 바라는 당신이 이상한 사람"에서부터 시작해 "심 감독 열정의 반도 못 따라가는 네가 무슨 자격으로..."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이봐라, 디워를 비판한 평론가들이 다른 '형편없는' 영화들은 좋게 평가했다'를 주장하는, 다분히 비난을 의도한 조선일보스러운 짜깁기마저 떠돌아다녔다.

반면 디워를 긍정적으로 다룬 몇몇 글(결국은 심 감독의 열정과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는 내용)은 '개념글'이라는 수식어로 조명 받으며 널리 읽혀 바라마지 않는 평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영화에 긍정적인가 아닌가가 글쓴이의 됨됨이마저 좌지우지하는 상황. 이해불가.

비판적인 내용으로 써내려간 영화평론이라고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은 좋더라, 발전 가능성이 있더라'를 거기에 첨가해야 할 의무는 없다. 영화 주체의 그간 고생을 헤아리고 격려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고. 그렇다고 디워를 비판한 글들이 소위 '예술영화를 평하는 기준'을 디워에 들이댈 만큼 야박한 융통성을 보인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한 뭇매 맞은 평들은 디워 스스로가 지향한 지점, 그러니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로서의 가치'에 영화를 끌어다 놓고 그것에 대해 논했다. 그 정도 자본을 들이고 그 정도 마케팅을 펼친 '거대한' 오락영화에 어느 정도의 만듦새를 요구하는 것은 평론가건 누구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또 사실 필요한 의문이고 지적이다. CG의 훌륭함으로 다른 부족한 요소들을 덮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관객 개개인이 판단할 문제일 뿐, '그렇게 봐야 옳다'가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논리들이 영화평론에까지 적용된 현 상황은 꽤나 우울하다. 대중의 기호나 시장 흐름에 적절히 맞추란 말, 그러니까 평론더러 죽으라는 말이, 아주 당연하게 오간다.

물론 한국 영화저널리즘에 헤아리기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은 문제점이 놓인 건 분명하다. 평단과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또한 좁히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디워의 그것과 관련한 작금의 공세들은, 분명 핀트를 잘못 맞추고 있다. 영화평론은 대중과 보다 친해질 필요가 있을지언정, 대중의 입맛에 따라 다시 쓰여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erazerh


# 사실 평단에 퍼붓는 이런 공세들은 그동안 영화언론에 쌓였던 불만이 그 자체로 표출됐다기 보다는, 한국사회의 '배타적 응집력'이 어떻게 생성되고 커 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에 더 가깝다. '몰이해를 동반한 적 만들기'라는 이 빌어먹을 악습은 도대체 죽을 줄을 모른다. 정말 지독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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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화평은 여기저기 곳곳에서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 글 중 하나가 됐다. 영화전문지에서부터 개인 블로그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영화 관련 글이 차고 넘치는 시대. 하지만 그런 각양각색에도 불구하고 글이 촉발되는 시기에 관한 한, 모든 영화평은 같은 대답을 지닌다. 요컨대 영화평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영화’인 것. 보다 정확한 시제로 말하자면 ‘완료된 영화’다. 쓰는 이의 입장에서 완료된 영화는, 촬영과 편집의 종료가 아니라 ‘보고 듣는 것’까지가 끝났음을 뜻할 터. 그러니까 모든 영화평은, 극장을 나선 누군가가 어떤 할 말을 쥐게 됐을 때 마침내 시작하는 것이다.

그 할말이 뱉어지는 곳은 어디까지나 극장 밖, 다름 아닌 현실이다. 현실에서 영화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여정. 그래서 나는 ‘현실을 향할 줄 아는’ 글을 좋은 영화평이라 생각한다(물론 그럴 여지를 영화 자체가 잠재한 경우에 한해서다. 비판이든지 옹호든지 그래야 가능하다). 현실을 향할 줄 안다는 말은, 영화를 경유해 도착한 실재 세계 속 어떤 지점과 관련해 영화평이 나름의 구조를 세울 수 있음을 뜻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구조를 세우다’가 정교한 조직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하고자 세계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더듬어보는 노력에 가깝다. 요컨대 영화평 쓰기는 영화가 건져낸 ‘지금 여기’를 ‘내가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내가 체계를 만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만든 체계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말을 떠올려보자. 영화평을 쓰고 있는 당신. 당신은 지금 당신의 소중한 체계를 만드는 한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현실과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프레임 안과 밖의 대화를 유도하는 매체다. 유도된 그 대화는 극장 밖으로 나와 다양하게 변주되고 또 여러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평은 그 흐름들을 포착하고 보존하는, 개인의 언어인 셈이다. 한 영화가 어떤 담론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인 텍스트성을 지닌다면, 즉 ‘살아있는 몸체’로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영화평의 사유 능력과 폭넓음에 대한 믿음이 애초에 전제됐기 때문일 것이다. 재생이 완료된 영화가 세상 밖에서도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영화를 둘러싼 개별 언어들의 그런 전방위 활약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영화평은, 영화의 완료에서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점에서 영화가 꼭 멈춰야 하는 것은 아님을 환기시켜주는 일종의 각성제 같은 것이다. 이미지의 지속 가능성이 제한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영화평은 (거의 유일하게) 빗겨갈 줄 안다. 상영이 끝남과 동시에 영화 이미지 또한 종료되는 것으로만 인식될 때, 그때 영화가 남길 수 있는 흔적은 사실상 몇몇 숫자들에 불과하다. 제작비와 관객 머릿수와 순수익, 혹은 영화나 배우의 뒷이야기 같은 것. 물론 영화가 산업의 틀 안에서 발생하고 소비된다는 점에서, 숫자들에 담긴 의미 역시 가벼이 넘겨볼 성질의 것은 아닐 테다. 영화에 따라서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수치나 수식은 어디까지나 속도전의 양상에나 어울리는 지표다. 그 지표들이 지상목표가 되는 경우, 영화들이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은 꽤나 빈빈한 일이 된다. 소비를 촉진하는 시간 속에서는 영화자본이 내리는 판단이 영화의 등장과 퇴장에 대해 가장 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나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 속도 때문에 영화가 먹고사는 것과는 별개인 시공간으로 여겨질 때, 또한 그것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때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영화는 여전히 고민하고 질문한다. 그 질문들을 극장 안에 그냥 남겨둘 참인가? 좋은 영화평을 쓰고 또 좋은 영화평을 찾아 읽고 싶은 욕망은 바로 그런 근심에서 출발한다. 영화평이야말로 영화의 지속시간을 무한대로 늘릴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이자, 사유의 통로를 지나온 대답이며, 그것의 보존과 공유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자, 지금 여기서 영화를 다시 써보자. 몇몇 영화는 당신이 꺼내고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여있을지도 모른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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