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결' '결심'한 까닭에 관해

 

 

※ 영화 <헤어질 결심>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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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결(決)의 축적이다. 한 사람의 시간 안에는 무수한 분별과 결정, 결단이 차곡차곡 쌓인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당장 오늘 끼니도 무엇으로 때울지 정해야 먹을 수 있다.

 

영화 매체로서의 물리적 시간, 즉 러닝 타임 또한 마찬가지다. 최종 결론 도출에 도움이 될 법한, 선택된 숏들이 상영시간 안에 빼곡히 들어찬다. 이 숏들이 영화라는 유기체 덩어리를 구성하면 영화는 체계 안에서 분류된다. 책꽂이에 꽂히듯 마이 추천 리스트에 정렬. 장르별, 키워드별, 감독별, 배우별 선호도 따위로.

 

영화 <헤어질 결심>이 분류될 자리는 거의 정해진 듯보였다. 남편이 죽은 여자(서래), 그 여자를 바라보는 형사-남자(해준), 훔쳐보기, 이끌림, 로맨스 또는 느와르의 어딘가겠지. 혹은 둘 다거나. 역시 팜므파탈, 파멸하는 형사, 박찬욱표 대사, 그러다, 어, 어? 마침내, 미결. 분류표를 걷어차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 버린 역행.

 

역행하는 영화. <헤어질 결심>

 

미결의 주체는 서래다. 그녀는 훔쳐보기의 구도 안에 있고, 사람을 죽이고, 또 사람을 이용하지만 팜므파탈이라는 규격 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는 반격의 멘트다. 그러면서 '독한 년'이 아니라 '몸이 꼿꼿한 사람'임을 알아챈 남자를 끌어안기까지 한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는 파격적인 고백처럼 들린다.

 

물론 이미 불쌍한 서래 씨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낼 생각이 없다. 도피. 어디로? 바닷가로. 바닷가는 영화에서 죽음을 장렬한 낭만으로 박제할 때 곧잘 찾아진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노킹 온 헤븐스 도어>, <타임 투 리브>, 심지어 박찬욱 본인의 <박쥐>까지.

 

그리고 최종 신(scene)에 이르러 두 번째 미결, 그녀는 바다에 가서는 땅으로 파고든다. 시신을 전시하고 쓸쓸함을 과시하던 관습에 안녕을 고한다. 관객한테나 해준한테나, 위로의 객체가 아니라 수수께끼의 창조자로 남고 싶은 듯하다. 도주의 완성이자 불멸의 사랑의 형태로서, 횡과 종이 뒤엉킨 트릭. 그렇게 서래는 해준에게 좌표를 찍을 수 없는 점이 되고 만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 중 하나일 수도 있고 그조차 아닐 수도 있는. 사랑이 어떻게 그래요. 사랑은 원래 그렇다. 설명 못 할 무언가. 미결사건의 완성.

 

사랑, 설명 못 할 무언가. <헤어질 결심>

 

서래는 이 전무후무한 증발로써 그녀가 감당해야 할 수식어들을 최소한 물리적으로는 따돌렸다. 살인 혐의와 행정상의 생사 증빙은 물론, 남편 잡아먹은 (중국)년 따위의 껍질도 벗어젖혔다. '시신' 딱지조차 달라붙지 않을 거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이 우주에서 사라지는 가장 완벽한 방법. 서래는 오직 해준이 살아있는 동안의 어떤 얼룩으로만 남게 됐다. 로맨틱하지 않은 절통의 로맨스가 이제 막 시작될 참이다.

 

이건 엄연한 변종이다. <헤어질 결심>은 훔쳐보기라는, 영화의 근원적 본질에 한 발을 담근 채 최첨단 관계 맺기 도구들을 경유, 각종 계보를 잇는 똘똘한 최적자인 척은 다하다가, 어느새 달아나버린다. 러닝 타임이 다됐는데 결론은커녕 말없이 안개만 흩뿌린 꼴. 하나의 유기체로 똘똘 뭉쳐가던 숏들은 뿔뿔이 흩어져 조금 전과는 다른 표정들을 짓고 있다. 자신을 물과 흙에 동시에 가둔 살인자의 사랑&실종극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듯. 이제 이 영화를 꽂아도 좋을 책꽂이나 분류표를 우리는 찾을 수 있을까. 글쎄, 본 적 없는 '걸작' 코너 정도면 괜찮으려나.

 

그러고 보면 <헤어질 결심>이라는 제목은, 영화를 보고 만드는 기존의 모든 습관과 헤어질 결심을 한, 박찬욱의 결별 선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결'이라는 '결'심. 마침내, 이질적인 무엇으로의 분화. 마침내.  erazerh

 

결국,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헤어질 결심] 누가 무엇과 헤어지고 싶었길래

'미결'을 '결심'한 까닭에 관해 | ※ 영화 <헤어질 결심>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라납니다. :) 시간은 결(決)의 축적이다. 한 사람의 시간 안에는 무수한 분별과 결정, 결단이 차곡차곡 쌓인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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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의 이전 대사들과 궤를 달리하는 한마디. “언제는 귀엽다며, 이 씨발년아.”가 불쑥 튀어나왔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영화가 이질적인 무엇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는 선언과도 같은 그 대사가, 나아가 관객의 예정된 불평에 부치는 박찬욱의 변(辯)처럼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언제는 거장이라며, 이 관객님들아.’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왜 박찬욱은 잘 나가던 내러티브를 작정하고 일그러뜨렸을까. 서로 다른 두 개(또는 세 개)의 박찬욱표 영화가 위태로이 엉겨 붙은 듯한 이 구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송강호는 한 인터뷰에서 이 불균질과 관련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달리의 그림은 경직된 현실에 틈을 내고 그 틈을 통해 어떤 관념이 흐르도록 만들 뿐, 그 자체로 불균질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어찌됐든, 너무 기괴한 나머지 아름답기까지 한 몇몇 시퀀스에도 불구하고 ‘복수는 나의 것 > 올드보이 > 친절한 금자씨 > 박쥐’라는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다. 불친절해서가 아니라 납득할 만한 ‘불친절의 당위성’을 아직 찾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악취미’의 향연 따위를 원인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 그것은 박찬욱에게서 이미 성취한 자의 과시욕을 읽어야 하는, 조금은 가슴 아픈 일이 될 테니. 설마 박찬욱이 <로스트 하이웨이>를 두고 본인이 했던 말, 즉 “자기 자신의 모티브들을 재탕 삼탕 우려먹는 안이함. 미완성 각본으로 폼만 잔뜩 잡는다.”를 몸소 실행했을까. 일단은, 조금 더 고민해보자. ⓒ erazerh


# 박찬욱의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건, 누가 뭐래도 <삼인조>다. 그 아름다웠던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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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3부작의 마지막, 어리석은 본능을 동정하는 박찬욱 감독

(스포일러 有)


금자씨(이영애)가 백선생(최민식)의 입에서 재갈을 빼낸다. 드디어 백선생이 말문을 여는 순간이다. “금자야, 눈화장이 그게 뭐야~”. 13년 동안 칼을 갈아온 복수의 화신을 앞에 두고서 곧 ‘죽어야’ 할 놈이 하는 말이다. 이런 식이다. 인물이 툭툭 던지는 대사는 스크린 속 상황이 보편적으로 담을 듯한 느낌을 슬쩍 뒤튼다. 가뜩이나 세트도 단편실험영화 같은 마당에 웃음조차 건조하고 기괴해진다. 불친절한 감독씨다. 박찬욱 감독은 여전히 이미지와 대사의 부조화(또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낳는 모순의 미학을 즐기는 것 같다. 꿈이 무서워서 깬 것이 아니라 ‘너무 지루해서’ 깨버렸다는 김민종의 고백(<삼인조>)에서부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선생이 동화구연투로 친절하게 통역하는 모습까지, ‘정상적’인 플롯을 비껴가는 박찬욱 감독의 장난질은 정말이지 그칠 줄을 모르는 듯하다.


너나 잘하세요. 나는 비틀 테니


복수 시리즈를 종결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전작들이라 할 수 있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보다 비틀기라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한편 그동안 아껴두었던 내러티브 교차도 선보인다). 금자씨는 마치 <미션 임파서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그래서 다소 뜬금없게도 보이는 서류 훔치기 액션을 통해 호주로 입양되었던 딸을 데려온다. 다른 모녀상봉 드라마와 다르게 이후에도 모성애 발현이나 ‘피는 물보다 진했다.’로 귀결되는 갈등해소 과정은 강조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저 어긋나고 끊기는 대화가 오갈 뿐이며, 정작 갈등이 봉합되기 시작하는 때는 복수극이 완료된 직후라고 영화는 암시한다. 내레이션으로 미루어 보아 어머니와 딸로서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마도 수년이 흐른 뒤의 일이리라. 뒷부분인 폐교씬에 이르면 ‘민주적 학급회의’의 목적이 효율적인 ‘집단살인’이 되어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는 박찬욱 감독의 정상 궤도 벗어나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어긋남은 조금 더 넓은 범위로 다가가 기존의 윤리 기준을 가차 없이 뽑아버리기도 한다. 찬송가를 부르며 금자씨의 출감을 맞는 교인들은 “너나 잘하세요.”라는 배반의 목소리를 듣는가 하면, 준비해온 두부가 으깨어지는 수모도 당한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라던 가르침은 실행할 틈도 없다. 금자씨는 복수심을 통제하는 선의의 제도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영화는 제도 자체에도 능력을 부과하지 않는다. 교도소는 교화의 기능은커녕 다시 한번 강자와 약자를 구분 짓는 약육강식 공간으로 자리하며, 금자씨에게는 복수 전주곡으로서의 친절을 연주할 좋은 공연장이 되어준다. 또한 전도사는 주님의 사업 때문에 기꺼이 악인의 하수인임을 자처하고, 진범을 잡는데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경찰은 순조로운 복수극을 위해 친절한 도우미가 되어 등장한다.

이처럼 박찬욱 감독은 상황과 대사의 보편적 결합을 비틀고, 나아가 옳은 일을 한다고 여겨지는 제도나 권력에는 조롱과 냉소가 뒤섞인 묘한 웃음을 보낸다.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경계는 전작들에 이어 다시 한번 무너지며, 이 같은 경계 흐리기의 분위기는 초현실이 가미된 모호한 현실을 거쳐 ‘속죄 받을 수 없는 행동’을 ‘해야만 하는’ 아이러니로 나아간다. 그리고 복수를 둘러싼 역설적 기운의 한 가운데에는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기꺼이 친절녀로 변신했던 복수녀 금자씨가 서 있다. 개의 형상을 한 백선생을 썰매로 끌어다 놓고 “안녕히 가세요.”라는 친절한 멘트와 함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녀는 마치 천상에 있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증오와 사랑, 살인, 구원을 향한 열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바로 금자씨의 머릿속이자 ‘복수’라는 테마가 운명적으로 다다르게 되는 딜레마의 지점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개별 플롯들 외에도 그것들을 포함한 전체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에서도 꽤나 불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내러티브는 복수를 둘러싼 인과관계나 시간순서가 아니라 금자씨의 심리를 따라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 따라서 금자씨가 교도소 동지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들과 관련한 교도소 이야기가 에피소드처럼 삽입된다. 회상 시퀀스는 금자씨가 어떻게 ‘친절한’이란 수식어를 달았는지 설명하면서 현재 상황과 맞물려 그녀의 감정선을 드러낸다. 관객은 한 장면이 전개될 때 그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 물론 그녀 마음 깊은 곳에 드리운 정확한 표정은 읽기 어렵지만, 비교적 단선적인 스토리 라인이 ‘역동성’이라는 면에서 이 같은 지그재그 구성에 빚을 지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처럼 박찬욱 감독은 영화의 굴곡을 복수의 진행이 아니라 ‘복수라는 풍경’의 파편을 조합하는 데에서 찾아낸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래서 이야기하는 영화보다는 ‘그려나가는’ 영화에 가깝다.

<친절한 금자씨>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형상화하기 위해 이미지, 혹은 사운드의 효과를 가능한 한 최대로 활용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림’이라는 느낌은 두드러진다. 영화가 담고 있는 핵심 개념인 ‘복수’는 물론 한 줄로도 풀이될 수 있는 그리 어렵지 않은 단어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표면적인 의미만이 아닌, 내면 어딘가에 큰 흉터로 자리 잡고 있을 증오심, 그리고 그 분노가 어떤 단계를 거쳐 기어코 실천되는 광경(또는 그 이후의 광경)으로서의 복수를 그려내기 위해 끊임없이 프레임에 덧칠을 한다. 세트는 인물이 꾸는 꿈속에서 그 느낌을 빌려온 듯 강렬하고 원초적이며, 적절히 배치된 상징(예를 들면, 두부)은 금자씨의 증오, 혹은 구원을 향한 갈망이 어떤 길로 접어들지 이해하는 데 키워드로서 기능한다. 또한 이미지로 미처 전달되지 못하는 감정의 미묘한 변화는 바로크 음악의 감성적인 선율 위에 살짝 얹혀지기도 한다. 무색, 무취의 복수는 (다소 과잉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상징과 추상적 이미지들, 사운드가 빚어내는 화려한 수사를 거쳐 비로소 손에 닿을까 말까한 거리까지 다가오게 된다.

정상적인 플롯을 벗어나는 상황과 설정들, 그리고 풍경화와 추상화를 오가는 전개는 필연적으로 ‘복수’라는 목적지로 달려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또 다시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복수란 과연 무엇인가?’ <친절한 금자씨>가 전작들과 분명하게 차별되는 부분은 ‘복수는 과연 속죄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전작들보다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복수 자체가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애초부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금자씨의 복수극이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는 이유다.

한편 다른 보편적인 영화가 복수를 다루는 방법 -인물의 복수심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성공하면서 끝맺는- 과 다르게 주제에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친절한 금자씨>도 전작들과 같은 맥락 위에 있다. 따라서 <친절한 금자씨>에는 전작들이 지닌 속성(<복수는 나의 것>의 서늘함, <올드보이>의 뜨거움)이 뒤섞여 있다. 금자씨가 툭툭 내뱉는 말들은 거침없이 복수를 진행하는 그녀에 어울리게 싸늘한 어조로 표현되지만, 처형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때면 영화는 복수심으로 후끈 달아오른다. 그러다가도 카메라는 어느덧 냉소어린 시선으로 돌아가 그들의 행동에 회의를 품기도 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한’ 복수 시스템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복수’라는 단어는 누군가의 통쾌한 무용담을 뜻하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상실한 인간들은 지켜주지 못했다는 스스로를 향한 질책과 세상에 대한 무작위의 분노를 하나로 묶는다. 그러고는 그것을 복수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를 향한 칼부림으로 표현한다. 이제 신체는 절단되고 장기는 소화된다. 이 같은 폭력은 언뜻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위는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복수에도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각각의 폭력은 타당하되, 그 끊어지지 않는 순환고리는 복수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황폐한 세계의 상징일 뿐이다. 클로즈업과 롱테이크로 비춰지는 공장의 괴물 같은 기계처럼, 그리고 그 부속품처럼 인간은 비정하고 차가운 복수 기계로만 작동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복수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메마른 이 땅에 남은 유일한 대화방법’을 뜻한다. 그것이 좁힐 수 없는 계급 간극 탓이든, 자의 또는 타의로 귀를 닫아버린 인간군상들 탓이든, 상실감과 죄의식은 오로지 분노와 살육의 형태로만 표현 가능하다.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의 구분은 없다. 비정한 세상 풍경을 채우는 것은 소통 불능이 남긴 순환하는 복수극과 그 결과물로서의 비릿한 고깃덩어리다. <복수는 나의 것>의 또 다른 제목으로는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복수뿐>이 적절할 듯하다. ‘착한 놈’인 류(신하균) 역시 일단은 죽고 봐야 하는 운명에 처하니 말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 황량하고 단절된 세상풍경을 묘사하는 단서로 복수의 순환을 담아냈다면, <올드보이>는 보다 제한된 범위에서 좀 더 깊게 복수를 설명한다. 초반은 다른 복수영화와 다르지 않게 출발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15년간의 감금으로 원한과 증오를 꾸역꾸역 쌓아 괴물이 된 오대수(최민식)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복수할 대상을 좇는 스릴러의 끝에는 그러나 액션이 주는 짜릿한 쾌감 대신 비극적인 결말이 운명처럼 자리를 꿰차고 있다. 오대수가 몸으로 체득한 분노 에너지는 화려하게 폭발할 틈도 없이 결국 또 다른 분노 에너지 앞에 무너지고 만다. 복수의 에너지와 에너지가 충돌하는 지점, <올드보이>는 그곳에서 ‘시작은 미약한 혀끝이었지만 끝은 정말 창대하도록 비참한’ 복수극의 필연적 결말을 보여준다.

‘무거운 돌이든 가벼운 돌이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 했던가. 사소한 데서 빚어진 상실은 원한이라는 씨앗을 낳고, 그 씨앗은 복수라 불리는 거대한 톱니바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톱니바퀴들은 상대를 마모시키기 위해 스스로 마모되는 것을 감수한다. 결국 한쪽이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부서질 때, 혹은 상대를 부술 때, 복수로써 삶을 꾸리던 개인들은 동시에 무너진다. 복수를 목표로 한 인생은 매우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언젠가는 급격히 식어야 한다. 그것이 ‘올드’해졌어도 여전히 ‘보이’인 자들이 겪을 운명이다.


복수와 속죄의 사회학

증오 밖에 건질 것이 없는 비정한 땅덩어리를 관조하고, 그 에너지에 취해 게임 밖으로 다시는 나올 수 없었던 사나이들을 떠나보낸 후, 박찬욱 감독은 이제 복수를 끝내야 할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다시 <친절한 금자씨>로 돌아와서.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복수의 활극은 예상대로 사적인 차원에서 시작되며, 속죄와 구원을 향한 소망 또한 일단은 개인적 갈등으로 귀속된다. 앞에서도 말했듯, 금자씨는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착한 제도들에는 관심이 없다. 복수를 하든, 용서를 하든, 속죄하고자 두부를 먹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금자씨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문제다.

이번에도 역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칙은 흐른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의 장기를 씹어 먹고 동진(송강호)이 딸이 빠져죽은 그 물 속에서 카니발을 벌인 것처럼, 남의 목숨을 빼앗은 백선생은 제 목숨을 내놔야 마땅하다. 그래서 <올드보이>의 이우진(유지태)은 말한다. “우리는 알면서도 사랑했다.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여기까지다. <친절한 금자씨>가 전작들과 공유하는 영역은 여기까지다. 금자씨가 부여잡은 복수의 끈은 전작들과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와 동진이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복수라는 끈의 양끝을 붙잡았고, <올드보이>에서는 오대수와 이우진이 마찬가지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친절한 금자씨>의 백선생은 그 끈을 잡을 권리가 아예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영락없는 가해자이자 악당이다. 금자씨가 잡은 끈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복수씨 대신 3부작의 완성에 걸맞게 질문 하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호한 경계는 백선생을 제외한 한쪽으로 집중된다. 박찬욱 감독은 좌우동형이던 복수 시스템의 한쪽을 제거한 후, ‘드디어’ 그 빈 곳을 복수와 속죄, 구원에 관한 질문으로 채워 넣는다. <복수는 나의 것>이 다소 거칠게 복수씨들을 스크린으로 데려오고, <올드보이>가 그 위에 화려하면서도 비극적인 수사를 덧붙였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 테마를 마무리하기 위한 종결형 어미의 영화인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복수와 속죄의 사회학이다. 선의의 제도에 거는 기대 따위는 애초에 가질 생각이 없었던 금자씨는 사적 차원에서 처형을 준비한다. 영화 카피인 “받은 만큼 드릴게요.”는 복수심에만 한정된 말이 아니다. 수감생활 중 금자씨의 배려, 또는 친절한 살인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 역시 받은 만큼 금자씨에게 무엇인가 해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받을 것은 받는 금자씨는 거처와 일자리를 얻고 ‘예쁜 총’으로 백선생을 겨눌 수 있게 된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집행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 박찬욱 감독은 정말로 ‘받은 만큼 돌려드리는’ 사형식을 선보인다. 금자씨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 거야. 속죄, 알아? 큰 죄를 지었으면 크게, 작은 죄를 지었으면 작게.” 이 말은 영화 속 백선생 처형식에 논리적 타당성을 얹어준다. 한명을 죽였으면 한명에게, 여러 명을 죽였으면 여러 명에게 당해서 속죄해야 옳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달라졌을까. 멋쩍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보지만, 정작 파티의 주인공이어야 할 아이들은 여전히 그들 앞에 없다. 돌아오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계좌번호로 흘러들어올 의미 없는 몸값이다. 뼛속까지 사무쳤던 원망을 실어 칼을 휘둘러본들 이미 잃어버린 존재는 다시 만날 수 없다. 부재한 자식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조일 것이고, 그 중 누군가에게는 백선생의 망령이 또 다른 속죄로 가는 길에 걸림돌로 작용할지 모른다. 임무를 완수한 친절한 금자씨의 표정은 어떠한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기쁨과 슬픔의 경계에 서 있는 모습이다. 길고 길었던 복수를 끝냈다는 점에서 후련하게 웃음지어야 하겠지만, 오랫동안 악마에게 지배당해왔다는 서글픔이 컸을까. 혹은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때문일까. 복수심의 영역과는 또 다른 분노가 그녀 얼굴 위에 스며든다.


저건 저건 내리치는 검은 칼

내레이션이 밝히듯 금자씨는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 한 아이가 죽음에 이르는 데 일조했다는 죄책감과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원망은 누군가를 처단하기 위한 복수극으로 이어졌지만, 죄의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금자씨의 이 같은 내면은 어느새 훌쩍 커버린 원모(유지태)를 환영으로 불러온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금자씨의 입에 원모는 재갈을 물려버리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마치 이우진의 얼굴이 되어“아직도 모르겠어요? 내가 애가 아니었다는 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유령이 된 원모는 애초부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금자씨가 과거로부터 들고 온 죄의식과 그 기운 서린 공간이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는 원모를 필요로 했을 뿐.

속죄를 향한 열망이라는 점에서 두부 모양을 한 흰 케이크는 복수와 같은 목적을 띤다. 복수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건만, 금자씨는 케이크에 박은 얼굴을 떼지 못한다. 아마도 영화가 끝나더라도 그녀는 그렇게 쭉 있을 것이다. 구원받고 싶으니까. 슬프고 허무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복수는 속죄의 수단이 되지 못할뿐더러 그 자체가 또 다른 죄악일 수 있다.’라고 대답하지만, 미워하고 원망하는 감정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니, 부인하지 못한다가 옳겠다. 소중한 존재를 잃은, 그래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떨쳐버릴 수 없는 상실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증오를 품는다. 증오심은 원초적이며 에너지로 넘쳐난다. 따라서 삶의 이유를 잃은 자에게 복수는 또 다른 삶의 이유로 다가온다.

“저건 포플러나무가 아니다 / 팽개쳐 일그러진 두 바퀴 / 소리치는 몸뚱이 / 저건 저건 내리치는 검은 칼”


최정례 시인의 ‘창’, 그 마지막 연이다. 아무리 사소하고 연약한 나뭇잎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칼이 될 수 있다. 소중한 것을 잃은 자신에 실망하고 세상에 치를 떤다면, 나뭇잎마저 칼로 느낄 만큼 세상이 두려워진다면, 그 사람은 감추었던 칼을 꺼내들 것이다. 그 칼은 ‘착한 유괴’를 한 류와 ‘나쁜 유괴’를 한 백선생을 가리지 않는다. 잃어버린 자에게 상실은 항상 같은 무게이며 ‘표적’을 겨누는 원한의 크기 또한 동일하다.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로 오대수는 결국 혀를 내놓아야 한다. 이렇듯 상실이 남긴 고통 주변에는 광기어린 분노와 또 다른 고통이 들끓는다. 자신이 받은 칼날은 누군가에게는 되돌려주어야 하는 법. 물론 상처는 낫지 않으며, 죽은 이가 돌아올 리는 더더욱 없다. 게다가 복수심에 칼을 들이댈 때, 자신 또한 그 칼에 상처입기 십상이다. 흉터 하나가 더 생길 수도 있다. 나뭇잎이 언제 내 살을 도려낼지 모르는 세상, 그러나 받은 만큼 돌려드리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예술과 산업의 그래프 어딘가에 무수히 찍혀 있을 거라 추측되는 영화의 좌표들, 박찬욱 감독은 복수 3부작을 통해 그 안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새겨 넣는다. 그 위치는 모호할지언정 점이 존재하는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순식간에 복수의 화신이 될 수도, 복수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인간은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 얽매이는 어리석은 본능을 드러낸다. 자신을 갉아먹을 줄 알면서도 결코 멈출 수는 없는 인간, <친절한 금자씨>는 그 슬픈 영혼들을 위한 한 편의 ‘위로 메시지’다. 지나치게 차갑고, 지나치게 뜨거웠던 복수 시리즈는 이제 평온한 시선을 찾아 나섰다. 구원은 힘들어도 동정은 가능하다. 그래서 희망한다. 금자씨 머리 위로 하얀 눈이 오래도록 내리기를.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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