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은 나오지만 '성룡표'는 아니다


성룡은 어느 정도의 고정 관객을 보유한 배우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성룡표 영화'를 기대하며 찾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영화가 지닌 '유쾌함' 때문일 것이다. 그 흔한 키스신이나 사랑얘기 한 번 안 나오지만 성룡의 영화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즐겁고 매력적이다. 기발한 세트에서 재기발랄하게 펼쳐지는, 위험천만하면서도 코믹한 액션은 성룡표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공식이 되었다.

하지만 프랭크 코라시 감독의 <80일간의 세계일주(Around The World in 80Days)>는 성룡 고유의 '사물 이용 액션'보다는 과장된 유머나 곳곳에 등장하는 카메오의 공세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전의 성룡 영화를 기준으로 본다면 다소 실망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쥘 베른의 유명한 소설에서 제목과 등장인물을 빌려 왔지만 원작의 은근한 유머와는 다르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기려고 정신없이 노력한다. 코믹영화다운 대사가 반복되고, 필리어스 포그(스티브 쿠건)와 파스파투(성룡), 여기에 모니끄 라로슈(세실 드 프랑스)가 연합해 세계 각국의 카메오를 만나 좌충우돌해보지만 폭발적인 웃음은 끌어내지 못한다.


각 에피소드는 80일 안에 세계를 여행하는 데에 ‘올-인’한 포그의 마음처럼 급박하게 진전되다가, 파스파투의 고향인 중국 마을에서 갑자기 느슨해진다. 시장에서 싸게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긴 ‘옥부처’와 이것을 기어이 고향까지 가져온 파스파투에 시간을 조금 허락해보지만, 큰 보람은 없다.

머뭇거리던 이야기는 중국을 벗어나자 다시 빨라지고 급기야 포그는 라이트 형제보다 조금 앞서 ‘날틀’(파스파투의 노가다로 움직이는)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세 사람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달성되는 순간, 가장 기쁜 사람은 어쩌면 관객 중 한 명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우리가 바라던 ‘아기자기 조마조마한’ 성룡표 코믹액션을 줄이는 대신 슬랩스틱과 캐릭터의 물량공세에 의존한다. 그러나 1억 달러가 넘는 제작비에 비하면 볼거리가 빈약한 편.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다국적 프로젝트는 ‘성룡표’와 ‘과장된 유머’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다가, 결국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진보 과학에 승리를 선언, 어줍게 19세기 유럽을 끌어안는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홍콩 출신 배우들의 영화 속 이미지는 반환 이전과 분명히 달라졌다. 활동 무대가 반환 이전의 홍콩, 아시아에서 세계로 변했기 때문이다. 성룡은 이들 중에서도 할리우드 자본력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절하게 결합한, 꽤나 높은 경쟁력을 유지해온 배우다.

<턱시도>에서는 그의 액션이 테크놀로지에 묻혀 빛을 바랬지만, <러시아워>나 <상하이 눈/나이츠>는 성룡 특유의 액션과 재치를 기본으로, 버디 무디의 재미를 잘 버무린 분명한 성룡표 영화였다. 이에 비해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다소 아쉽다. 성룡은 나오지만 그의 장기는 별로 발휘되지 않았으며, 왁자지껄한 코미디는 요란스러울 뿐, 성룡의 몸사림으로 인해 생긴 빈틈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성룡의 팬으로서, 그도 어느새 쉰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서 일까. 다음에는 그가 몸은 사릴지언정(사실 54년생인 성룡이 여전히 이 정도의 액션이라도 보여주는 것에는 감탄할 따름이다) 특유의 재치만은 잊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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