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이라는 기억을 상실하다

제임스 본드에게는 해야 할 일이 언제나 ‘주어진다.’ 적의 음모를 파헤치고 끝장냄으로써 세계 질서의 올곧음을 증명하는 따위의 임무. 성공리에 일을 마친 본드는 어김없이 미녀와 유유자적을 즐기지만, 사실 그 순간 진정한 포만감을 느끼는 쪽은 따로 있다. 누군가의 핏더미가 당분간 공공의 안녕을 보장해줄 거라 굳게 믿는 자들, 즉 제임스 본드가 치르는 그 모든 전투의 실질적인 명령 주체들 말이다. 그들에게 평화란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한 대치 상황 자체이기 마련. ‘국가안보’ 따위의 수식어는 이항대립 구조에 정당성을 입히기 위해 동원되는 공공적 포장지에 가깝다.

요컨대 첩보원 제임스 본드는 그 욕망들이 꿈꿔낸 궁극의 인간병기, 나아가 일종의 로망이라 할 수 있다. ‘국가’라는 이름의 무게를 매력적인 백인남성이 짊어짐으로써, 실재할 법한 모든 위험요소가 활극의 재미 차원으로 환원되는 셈이다. 모르기는 해도 아름다운 본드걸과 기상천외한 첩보도구 못지않게, 국가가 부여한 007이라는 살인면허 또한 본드에게는 꽤나 자랑스러운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이제 ‘본 시리즈’의 완결편 <본 얼티메이텀>이 여기에 도착했다. 제이슨 본. 이름과 마찬가지로, 애초에 부여받은 임무 역시 제임스 본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 하지만 우리는 그를 첩보/액션 현장에서의 ‘판타지스타’로 기억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본은 기존 첩보영웅들과는 다른 동선을 갖도록 운명지어진, 일종의 변종이자 자성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본 아이덴티티>가 플롯 첫머리에 ‘기억상실’을 심어둔 그때부터, 본의 총구가 영웅담을 지향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던 셈이다. 제이슨 본이 싸워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파괴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상기하자.


복합시점과 핸드 헬드, 그 두근거림


<본 얼티메이텀>에서 본은 마침내 그 기나긴 싸움을 끝낼 기회를 잡는다. 과거를 영원히 묻으려는 자들의 파상공세를 어떻게 뚫느냐가 관건. 보다 신속․정확해진 디지털망으로 무장한 그 공격들은, 마치 무수히 뿌려진 점들처럼 촘촘하며 또 긴밀하기까지 하다. 단 한번의 실수조차 본에게는 사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다 민첩하면서도 섬세한 움직임을 갖추지 않을 수 없는 노릇. 그러니까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본 얼티메이텀>은 ‘제이슨 본의 동선이 그를 죄여오는 점들 사이를 어떻게 헤쳐나가 목적지에 도달한 것인가’에 관한 영화라고.

점과 선. 이 1차원적 요소를 전율 가득한 입체로 탈바꿈시킨 공은 명백히 촬영과 편집의 몫이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본 슈프리머시>에 이어 이번에도 히치콕이 말한 정서적 참여의 원칙, 즉 “서스펜스는 관객이 위험을 알고 있을 때 발생한다.”를 연출의 토대로 삼은 듯하다. 예컨대 생사의 갈림길에서 긴박한 리듬을 타고 면밀히 엮이는, 쫓기는 자의 시점과 쫓는 자의 시점 같은 것. 다급하게 교차되는 이 복합시점은 헨드 헬드 숏의 두근거림과 맞물려서는, 관객을 순식간에 긴장과 불안의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마술적 효과’를 발휘하기에 이른다. 마치 차들이 내 앞뒤좌우로 씽씽 다니는 신호등 없는 사거리 한 가운데에 던져진 듯, 현기증 나는 전율로 빠져들게 되는 이유다. 긴장이 팽창해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날 것 그대로 전달할 줄 아는 이 카메라 놀림과 치밀한 편집은, 또 하나의 고유한 ‘서스펜스 공식’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영화 후반부. 제이슨 본은 그 모든 공격을 뚫고는 잃어버린 기억과 마침내 마주한다. 하지만 여기서 확인되는 감정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허탈함이다.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했던 비극을 쉽사리 떨치기는 힘들 터. 그럼에도 본의 기나긴 싸움에서는 어떤 진정성 같은 것이 베어 나온다. 위선과 몰이해와 분노 따위가 맞물려 빚어내는 ‘적 만들기.’ 곳곳에 산재된 그 파괴력을 돌파해낸 힘의 근원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그의 태도와 그 태도를 담아낸 묵직한 일관성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이슨 본의 진짜 아이덴티티는 ‘과거의 나’를 만나면서부터가 아니라 기억을 잃은 그때부터 출현한 매순간의 ‘지금 여기의 나’를 통해 꾸준히 형성되어온 셈이다. 이것은 일종의 ‘성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영화가 끝났다고 해서 그의 성장이 멈추지는 않을 터, 앞으로 본에게 떨어질 지령들은 그래서 자못 흥미롭다. 이를테면 첫째, 죽인 사람들의 ‘이름도’ 기억할 것. 둘째, ‘본 아이덴티티’를 잊지 말 것.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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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영화에서 젊은 남녀가 낯선 공간으로 들어갔음은, 이후의 플롯 - 살인마의 난도질을 둘러싼, 죽고 죽이기에 관한 풍경들 - 을 충분히 예측 가능하도록 만든다. 호주산 슬래셔 <울프 크릭> 역시 그런 전통을 골격으로 삼는다. 젊은이들은 외진 곳을 향하며, 거기에는 불길한 조짐이 있으며, 아니나 다를까 한바탕 살극은 어김없이 펼쳐진다.

하지만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려는 진짜 대상이 무엇인가라는 점에서, <울프 크릭>은 기존 슬래셔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양새를 한 영화가 된다. 긴장의 수위를 쥐락펴락 조절하거나 살인의 방법을 다채롭게 클로즈업하는 데에, <울프 크릭>은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영화가 방점을 찍는 곳은 바로 희생자들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공포와 비통과 필사적인 생존본능이 뒤엉킨 바로 그 얼굴들. 평범했던 여행길이 악몽의 시공간으로 바뀌었음은, 살인의 순간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최대치가 새겨진 그들의 얼굴이 핸드 헬드로 흔들릴 때, 비로소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된다.

스스로 포스터를 통해 밝히고 있듯이, <울프 크릭>은 일종의 '콜라주'(collage)다. 비명 섞인 얼굴의 희생자들과 비열한 웃음의 인간사냥꾼(평온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박제된 시간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는, 사냥을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할 줄 아는, 극렬 마초/미친 아버지)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악몽의 콜라주.

낯선 공간/사람을 '위험'으로 환원하는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울프 크릭>이 빼어난 호러인 이유는, 아마도 그 콜라주에 진하게 베어 있는 현실의 그림자 때문이 아닐까. ‘살인의 추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 비단 호주에만 살지는 않을 거라는, 바로 그 현장감말이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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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다시 돌아온 9월 11일. 그러나 현대사를 주도하는 것은 여전히 대립의 정치학이며, 세계에 펼쳐진 간극은 '비극을 낳아왔음'을 잊어버린 채, 공포의 재생산과 확대를 통해 또 다른 악몽을 연신 창조해댄다. 물론 사건 배후와 조작 여부에 관한 각종 의혹 또한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남기는, 지긋지긋한 파괴자들.

<플라이트 93>은 각종 정치적 욕심들이 쳐놓은 장막, 그 흙탕물 같은 수사를 걷어내고는, 혼란으로 각인된 9ㆍ11 당시의 시공간만을 한정적으로 스크린에 옮긴다. 유일하게 '임무'에 실패한 항공기 '유나이티드93'과 미연방항공국, 관제 센터를 오가는 핸드 헬드의 향연은, 비극에 휩싸인 표정들의 면면을 엮어서는, 승객과 승무원, 테러범(이라 일컬어지는) 등 모두가 겪었을 현장의 고통을 생생하게 증언해낸다. 어떤 특정한 정치적 방향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지만, 상처를 뒤덮은 수많은 잡소리 대신 그들의 잊혀진 기도에 귀 기울일 것을 권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새로운 출발점을 누군가는 찾아 나서길 희망한다는 점에서, <플라이트 93>은 오히려 정치적 사유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영화가 된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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