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고, 소설)

나는 의사의 아내가 영화 <엘 토포>의 엘 토포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둘 다 일종의 '목동'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양떼를 이끌되 양떼와 자신을 구별 짓지 않는 그런 목동 말이다. 물론 이는 남들보다 단지 영민하다고 해서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늘 그렇듯이, 관계 맺음을 진보시키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진정한 리더는 너와 나의 '차이'에서 '우열'을 발견하는 법이 없다. 이것은 일종의 '용기'다. 너와 나, 또는 우리가 공통으로 지향해야 할 지점에 관한 해답은, 이 용기에서 비롯될 때만 진짜가 된다. '혜안'이라고 불리는 모든 답들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 erazerh


#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아직 보지 않았다. 여기저기 정보에 따르면 꽤 못 나온 것 같기는 하다. 물론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은 해야겠지. 어쨌거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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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정말 확실하게 믿는 것 같다. 카메라의 역할은 ‘주목받지 못했던, 세상의 측면을 감지케 해주는 것’이라고.

그의 전작 <시티 오보 갓>은 빈민촌 시티 오브 갓의 폭력적 공간성과 그 순환하는 연대기에 관한 영화였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시티 오브 갓>을 통해 리우 데 자네이루의 악랄했던 시공간을 역동적 플롯으로 과감하게 스크린에 되살렸고, 고발의 리얼리즘을 희망했던 전투적 카메라는 구석진 세상에까지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콘스탄트 가드너>를 통해 제3세계(라 불려야 하는)라는 외진 공간으로 다시 한번 관객의 시선을 끌어 모으려 한다. <시티 오브 갓>이 기억되지 않는 시공간과 인물을 성장기의 틀을 빌려 환기시켰다면, <콘스탄트 가드너>는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강대국 자본이 아프리카를 어떻게 유린하는지를, 슬픈 로맨스와 장르적 내러티브의 얼개 안에서 이미지화하는 작품이다.

물론 현란하면서도 순간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카메라 움직임이나 리얼리즘에 감정을 실어내는 탁월한 숏들은 여전하다. 이를 테면, 사리사욕에 관한 썩은 대화들이 오가는 넓은 골프장과, 지붕이 다닥다닥 붙은 갑갑한 공간을 순식간에 같은 프레임 안에서 붙여버리는 장면. 물론 그러한 숏들을 만들어내는 힘은 누군가의 테크닉이 아니라, 스크린 밖 현실 자체일 테지만.

<시티 오브 갓>이 그랬듯이, <콘스탄트 가드너>는 장기지속하는 역사의 한 그물망이 되기를 꿈꾸는 영화다. 서방세계 중심의 논리가 여기저기 매체에 깃들어 죽은 진실을 전달하는 동안,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다시금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아프리카에 관한 거짓 신화들을 하나하나 해체한다. 그러고는 외친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물론 이것은 픽션이다. 그러나 때때로 픽션은, 취약 지대에 놓여 잘 보이지 않는 진리를, 눈과 마음으로 더듬을 수 있도록 구조화시켜주고는 한다. <콘스탄트 가드너>의 힘은 바로 그런 데서 나오는 것이다.

부조리한 현장을 이미지로,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 인식의 틀을 넓히는 데 단초가 될 수 있다는,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간절한 믿음을 나 역시 믿고 싶다. 당장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 그곳(들)은 이렇게라도 기억되어야 하니까.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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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이미지, 그리고 두 가지 전제


폭력은 영화 안에서 줄곧 재현되어 왔다.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은유하는 기재로, 인간의 억압된 분노가 표출되는 방법으로, 때로는 악을 규정짓거나 그것을 응징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로 등장하며, 폭력은 영화 역사가 이루어지는 내내 꾸준히 스크린에 제 모습을 투영해왔다. “영화 속 폭력이 현실에서 습득, 범죄로 반영된다.”와 “영화는 현실에 만연한 폭력성을 재현하거나 하나의 표현수단으로서 폭력을 응용할 뿐이다.” 등 영화 내 폭력에 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하지만 ‘폭력의 이미지가 한 작품과 작품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키워드로 기능할 수 있다.’는 명제만큼은, 어쨌거나 명백한 ‘참’으로 보인다.


영화 <시티 오브 갓> 속의 폭력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두 가지 사실 ― 1.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의 슬럼가(‘파벨라’라 불리는)를 배경으로 한 파울로 린스의 동명소설이 그 바탕에 있다는 것, 즉 ‘실화’라는 점, 2.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실화라는 점 ― 을 일단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역대 최고의 액션 스릴러’라는 문구는 잠시 잊자. 이 문구는 한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올 수는 있을지언정,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탈출구 없음, 슬프도록 처절한 미장센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인 부스까페는 회상한다. 변두리를 장악해온 폭력의 올가미와 그것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을. 영화 <시티 오브 갓>은 폭력의 끔찍한 연쇄반응, 또는 총과 마약이 어떻게 한 공간을 점령해 가는가에 관한 매우 직설적인 이야기다. 작품에 직접 드러나는 시공간적 배경은 60, 70년대의 그곳으로 한정되지만, 영화의 끔찍함보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사실은 스크린 바깥에서 이 악랄한 슬럼가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특정한 장소가 아닌 지구 곳곳에서. 이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곳(들)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가?


영화 속 이미지의 세계는 상영이 종료됨과 동시에 부재하게 되지만, 현실 세계로 투사할 수 있는, 이미지의 흔적은 우리 곁에 남기 마련이다. <시티 오브 갓>에서처럼 현존하되 눈에 잘 띄지 않던 세계를 ‘재현’하는 데 이미지의 무게중심이 놓인 경우, 관객이 던지는 질문이 현실 속 ‘내재하는 모호함’에 근접할 가능성은 좀 더 높아지게 된다. 그 질문들은 ‘현실을 오늘내일 바꿀 수 있는가?’가 아니라 ‘현실을 인식하는 지평을 넓힐 수 있는가?’라는 가능성에서 보다 생산적인 담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곳(들)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야말로 <시티 오브 갓>이 원하는 반응인 셈이다. 발터 벤야민이 <시티 오브 갓>을 봤다면, 카메라의 기능 ― 주목받지 못했던, 세상의 측면을 관객으로 하여금 감지하게 해주는 역할 ― 을 아주 멋들어지게 소화해낸 영화라고 말했을 법하다. ‘신화’를 해체하기 위한 기초공사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놀랍게도 아주 경쾌하게! 자, 이제 <시티 오브 갓>으로 직접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물론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는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는 일이 매우 흔하기 때문이다.


<시티 오브 갓>의 오프닝. 시끌벅적한 가운데 닭 한 마리가 불안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쓱싹쓱싹 칼이 갈리는 소리, 털이 뽑힌 동료가 그 칼에 죽는다. 자신의 목도 곧 떨어져나가야 하는 운명, 살고 싶다. 도망쳐보지만 결국은 혈투를 앞둔 제빼게노와 세누라 패거리들 틈에 갇히고 만다. 어디로 탈출할 것인가. 죽일 것인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불가능해 보이지만, 날아볼 것인가.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이 지점을 기점(起點)으로 삼고는 플래시백을 통해 첫 번째 에피소드로 향한다. 60년대로 되돌아가서 출발한 이야기는 영화 말미 다시 한번 동일한 시퀀스 ― 생명이 위태로운, 그러나 결코 탈출할 수는 없는 ‘닭 시퀀스’ ― 가 등장하는 곳까지 이어진다. 처음과 끝에 배치된 이 환유적 장치 사이에 위치하는 모든 시퀀스, 즉 <시티 오브 갓>의 거의 모든 플롯들은 따라서 이 갈 곳 없는 불안한 닭의 형상으로 수렴된다. 닭이 그렇듯, 시티 오브 갓에 사는 아이들에게도 미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영화 초/중반부를 장식하는 텐더 트리오, 그중 까벨레이라가 죽는 장면은 ‘탈출구 없음’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불안하기는 해도 나름의 미래를 품고 여자친구와 함께 도시 밖으로 나가려는 까벨레이라. 하지만 그를 배웅하는 것은 가족의 따뜻한 격려가 아니라 경찰의 총구일 뿐이다. 애절하고도 슬픈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까벨레이라는 결국 시티 오브 갓의 황량한 풍광(風光) 안에서 피를 흘린 채 비틀거려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만다. 안타까운 듯 흔들리며 그의 처절한 동선을 쫓던 롱테이크는, 하늘에 드리운 침울한 먹구름과 그 밑을 채우는 작은 집들, 그리고 시티 오브 갓이는 사막에 외로이 던져진 시체로서의 까벨레이라를 한 프레임으로 안고서야 멈춰 선다. 시티 오브 갓 그 어느 곳에서도 탈출할 수 없음은 이 비극적 색채의 미장센에서 명백하게 증명된다.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여성(까벨레이라의 여자친구)이거나 자동차를 가진 사람(경제적 능력을 지닌 외부인)뿐인 셈이다. ‘죽거나 혹은 달리거나’인 까벨레이라를 관찰하는 이 길지 않은 시퀀스에는 피토레스크(pittoresque)로 기능할 만큼의 빼어난 회화적 공간과 죽음을 향한 쓰라린 시선이 공존한다. 다닥다닥 붙은 낮은 집들과 우울함을 드리운 하늘빛은 지평선에서 출구를 걷어내며 정해진 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상징하는 화폭을 구성하고, 불가능한 도피를 바라보는 애절함이 그 위에 쓰라린 응시로서 덧칠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해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사실주의적 현장감과 낭만주의적인 슬픈 감성을 관객에게 동시에 전달하며,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들 못지않은 폭넓은 표현력을 선보인다.



차단, 통제, 방치의 공간 - 폭력의 ‘폭력적’ 순환


<시티 오브 갓>은 한마디로 스스로를 깨부수고 추락하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브라질 빈민촌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시티 오브 갓, 그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의 성장은 그렇게 총과 마약, 폭력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갇혀있는 아이들’이라는 점에서 <시티 오브 갓>은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와 닮았다. 지리적으로 아무리 변두리(‘방리유’라 불리는)를 벗어나더라도 자신들은 영원한 타자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오>의 빈쯔와 사이드, 위베르가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모든 대상을 향한 분노를 낳지만, 영화가 끝나도록 그들은 분노를 폭발시킬 기회조차 잡지 못한다. <증오>가 증오의 전방위화와 그 무기력을 오가며 폭염처럼 답답한 세기말 풍경의 방증(傍證), 또는 오늘날 프랑스를 매우 정확히 내다본 예언서가 되었다면, <시티 오브 갓>은 증오할 대상을 애초에 잘못 선택하도록 길들이는, 공간에 내재된 광기를 묘사함으로써 리얼리티를 획득해낸다(<시티 오브 갓>에서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를 은폐하는 마법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한 현미경으로서 기능한다). 고립과 차단을 거친 그 광기는 변두리만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배, 끝없이 되풀이된다.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추락하는 건 중요치 않아. 어떻게 착륙하는가가 문제지.” <증오>에 나오는 내레이션이다.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시티 오브 갓의 소년들 역시 착륙을 꿈꾸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다다르는 종착역 또한 추락에 다름없다.


폭력적 광기에 사로잡힌 변두리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하는 나름대로 건실한 평화주의자가 하루아침에 복수의 칼을 가는 갱으로 변하는 일 ― 이를테면, 마네 갈리나에게 일어난 일 ― 이 드물지 않다. 경찰이 할 줄 아는 일은 사태를 그저 관망하는 것과 뇌물을 챙기는 것, 또는 시티 오브 갓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쓰레기 취급하는 것 따위에 한정된다. 마약이 환각제의 차원을 넘어 마치 소금과도 같은 생활필수품이 된지도 이미 오래. 폭력이 폭력을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일 또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아이들이 범죄조직을 만들어 서로 죽고 죽이는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매일 반복되지만, 누군가의 ‘기획’이 빚어낸 이 결과물 앞에는, 이제 그 원인을 아는 사람도, 알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지금은 분명 환경 자체가 지닌 영향력보다는 인간의 능동적 의지에 조금 더 많은 지지를 보내는 시대다. 물론 ‘발전’이라는 가능성을 전제하는 데는 인간과 주변 환경과의 밀접한 상호작용이 필연이겠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주변 악조건이 지닌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는 충분히 보편적으로 공감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사회학 이론이나 보편적 법칙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던가. 불행하게도 예상대로, 여기 시티 오브 갓이라는 곳은 우리가 알고 있던 환경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원초적인, 마치 게릴라전 같은 긴장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긴장감은 전염성을 내포한다. 소년들이 갱이 되고, 그들의 동생이 또 다시 갱으로 자라는 평범하지 않은 계승구조는 시티 오브 갓을 아우르는 폭력의 자기장, 언제 어디서든지 감염의 손길을 내미는 그 파장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처절하고 광범위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을 우리는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거북이도 난다>에서도 만난 적이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지뢰에 죽어나가는 곳, 죽음과 회한과 분노를 하루일과로 만들어버린 그곳은 한 소녀의 등을 떠밀며 ‘하루라도 빨리 자살할 것’을 종용한다. 허무함이 삶의 흐름을 장악해버린 곳들은 그처럼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순환의 궤적을 그린 채, 시종일관 혹은 간헐적으로 어떤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그곳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불안한 주변 여건 상 자아의 불균질한 상태로 내몰릴 확률이 높다. 공간을 잠식해온 비상구 없는 답답한 기운은 균열의 조짐을 보이는 자아들 사이로 강력한 전염균을 퍼뜨린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부터 상대 패거리에 맞았다는 이유에까지, 전염균이 아이들의 그 모든 근거에 타당성과 면죄부를 쥐어주는 사이, 시티 오브 갓은 점점 더 많은 시체로 물들어간다. 무의식이 분열로써 주체를 탈중심화시킨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땅에 깃든 무의식인 전염균은 불안한 자아를 분열시키고 궤도에서 끌어내린다. 그리고 이전에도 그랬듯이, 공간은 평행선 위를 달리며 차단과 통제와 방치의 영역으로 접어들 것이다. 폭력에 동화된 소년들을 고스란히 품은 채로. 탈출구 없는 가난이 결과적으로 폭력의 씨앗이 되었고, 자라난 폭력은 어느 순간부터 공간의 ‘성격’으로 자리 잡았다. 가난을 해결한답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고 가두었던 정책은 이제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난 듯하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토대는 상부구조를 확실히 장악한다. 여기 시티 오브 갓에서처럼 말이다.


닫힌 지역이 아이들을 성장시킨다는 것, 즉 실제적으로 이곳 아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고 있는 불평등한 상황은 그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시티 오브 갓은 어른이 살지 않는 곳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아버지는 자식이 무서워 어딘가로 숨어 버렸거나 삶에 찌들어 사태를 방관할 뿐이다. ‘선량한’ 시민이거나 아이들을 이끌 줄 아는 어른(복수심에 불타기 이전의 마네 갈리나와 잠깐 나오는 택시기사가 유이(唯二)하다)은 매우 드문데다가 그들 스스로도 지역의 파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극단적인 폭력으로 살아가기를 모색했던 소년들은 이미 죽어버렸을 가능성이 크고, 아마도 무기력으로 일관해온 소년들이 영화 속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대부분 자랐을 것이다. 유치원 갈 정도의 나이인 어린이가 다징유(훗날 최고의 악당 제빼게노로 성장하는)처럼 자연스럽게 입에 마리화나를 물고 강도 살인하는 일이 만약 제1세계에서 있었다면, 사건은 그 즉시 해외토픽으로 보도되었을 테다. 하지만 <시티 오브 갓>에서는 그런 일마저 일상의 한 조각일 뿐이다.


한편, 영화를 관통하는 폭력의 과도한 흐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핸드 헬드 카메라의 ‘자유롭고 경쾌한’ 움직임에 따라 전개된다. 젊음의 ‘한때’를 집어내는 카메라는 마치 뮤직비디오를 찍으려는 듯 가볍고 산뜻한 시선을 견지한다. 그 안에는 서투른 로맨스와 다소의 수줍음이 있고, 사춘기적 감성과 가벼운 농담, 그리고 삼바리듬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문제는 역시 비틀어지는 순간들이다. “여자친구 한번 사귀어보라.”는 ‘가장 멋진 갱’ 베네의 충고에 제빼게노는 나이트클럽으로 ‘그냥’ 가본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베네와의 갈등. 제빼게노를 향하던 총구는 엉뚱하게도 베네를 맞힌다. 이러한 뒤틀린 조각들은 일상의 풍경과 광기어린 전쟁을 동의어로 만들어버린다. 계획된 고립성, 그리고 그것을 먹고 비대해진 파괴적 욕구가 균열된 틈 사이로 비치는 아이들의 불안한 영혼을 뒤흔드는 것이다. 살인, 강간 등 광기가 절정으로 표출되는 숏들을 보여줄 때도 카메라는 여전히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관객에게 전달되는 정서는 정반대로 전환되어 다큐멘터리의 영역으로 접어든다. 제빼게노가 마네 갈리나의 여자친구를 강간했음을 시사하는 신(Scene), 짧은 두 번의 암전, 이어지는 마네 갈리나의 허탈한 표정까지. 이 일련의 짧은 몽타주의 순간에 핸드 헬드는 ‘섬광처럼 스치는 광기’를 이미지화하며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의 도구로서 정점에 다다른다. 수시로 표정을 바꾸는 감정의 불균질한 조각들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서도, <시티 오브 갓>의 카메라는 이처럼 느낌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프레임에 투영할 줄 안다. 따라서 주목해야 할 것은 흥겨운 리듬을 바탕에 깔면서도 순간순간 벌어지거나 비틀어지는 틈, 그 간격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민첩한 폭력성이다. 흔들리는 것은 찰나이다. 그러나 시티 오브 갓에서의 찰나는 매우 위험해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가 된다.



계열체들로 이루어진 내러티브


이렇듯 <시티 오브 갓>의 내러티브는 공간성에 포획된 사람들, 그들의 역사를 따라 흐른다. ‘역사를 따라 흐른다.’는 말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을 염두에 둘 때, 보다 중요한 의미를 획득한다. 현실에서 주목받아온 사건과 장소가 아니라, 저 수면 밑에서 누락되고 실종되었던 시공간을 찾아 떠난다는 것. 시티 오브 갓이라는 공간은 어디까지나 잊혀진 곳이며, 그 위에는 역시나 잊혀진 존재로서의 시간, 그리고 그 시공간에 갇힌 ― 정확히 표현하자면, 시공간 안에 버려진 ― 사람들의 이야기가 운명적으로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러티브는 그 축적된 폐기물에서도 생명체가 실존해왔음을 증명하고자 그들 각자의 삶으로 ‘일단은’ 들어간 후에 전개된다. 개인 차원에 소제목을 붙이고 에피소드를 전개하는 이러한 현장감 넘치는 화법은, 아이들이 어떻게 폭력의 시공간에 동화되고 파멸되어 갔는지를 세밀하고도 역동적인 플롯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한다.


에피소드들은 각각 분절되었으면서도 겹쳐진다. 영화는 일단 텐더 트리오 이야기로써 60년대를 이어간다. 그리고 고립된 황무지로서의 사막 이미지, 그 안에 던져진 까벨레이라의 주검이 세월이 흘렀음을 알리는 경쾌한 리듬과 교체되어 미끄러지듯 사라지면, 배경은 70년대 풍경으로 접어든다. 이제 영화는 총과 마약, 피와 무자비의 중심에 서있는 제빼게노와 낭만을 아는 갱 베네, 또 다른 갱단을 이끄는 세누라를 가운데에 놓고는, 파괴 속으로 침윤(浸潤)해간다. 여기에 마네 갈리나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멀쩡한 사람마저 끌어들이는 막강하고도 광범위한 시티 오브 갓의 중력을 머금고 줄거리의 한 축으로 들어온다. 등장인물과 이야기들은 각각 시티 오브 갓을 설명하기 위한 부분으로 등장해서는 서로 얽히고 교차되어 각자의 영향력 아래 종속된다. 때문에 관객은 제빼게노를 알기 위해 선행된 텐더 트리오의 삶을 지켜보고, 마네 갈리나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 제빼게노의 만행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인물들이 거칠게 엮어낸 에피소드를 정교하게 직조된 내러티브로 전환하는 것은 변두리에서 일어난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는 부스까페, 그의 시선과 내레이션이다. 주목받지 못했던, 때문에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삶들은 부스까페의 눈과 입을 거쳐 비로소 씨줄과 날줄을 부여받게 된다. 이 씨줄과 날줄의 본질은 공간과 시간과 인물이 모두 얽히고 포개지는 ‘아파트 이야기’에 이르러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까벨레이라의 죽음 이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한 아파트의 작은 집에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그곳을 다녀갔던 ‘흔적들’을 한데 묶어 나열한다.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수년을 축약해 디졸브로 훑어 연결하는 이 시퀀스는 마약사업이 어떻게 아이들을 옭아매는지 잘 설명하는 한편, 그 자체로 공간과 시간과 인물을 관객 앞으로 모으는 기점(基點)이 되어준다. 분할되었던 시간과 그 안을 서성였던 사람들이 아파트에 자리한 작은 공간을 매개로 마침내 같은 지점으로 소환되는 것이다. 부스까페를 중심으로 한 씨줄과 날줄은 바로 시티 오브 갓의 시공간과 거기에 발붙인 개체들을 하나로 아우르며 묶을 수 있는 증거, 즉 ‘모두에 계열체(系列體)로서의 속성이 존재함’이 된다. 영화는 제빼게노를 총살한 아이들이 제빼게노와 같은 일생을 반복할 것임을 암시하면서 ― 호러 문법 ‘괴물은 죽지 않는다’를 연상시키면서 ― 끝을 맺는다. 그렇다. 아무리 세대교체가 되고 세월이 흘러도 시티 오브 갓을 지배하는 악랄한 기류는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60, 70년대 그곳이라는 시공간과 현재 그곳이라는 시공간의 관계, 그리고 그 자기장에 속한 사람들끼리의 관계는 명백해졌다. 주어(사람)를 바꾸고 주어가 속한 시점(시간)과 장소(가시적인 변화만이 가능한 공간)를 고쳐도 어디까지나 같은 특징을 지닌 계열끼리 교체될 뿐, 문장(시티 오브 갓)이 전달하는 큰 뜻은 달라지지 않는다. 문제점들은 해결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격리되어야 할 ‘악’으로만 규정되었고, 가역적(可逆的) 운명을 부여받은 폭력의 신은 그렇게 변두리를 관장해왔다.



장기지속의 그물망 - 인식의 틀을 확장하고자


이렇듯 <시티 오브 갓>은 변두리라는 가역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그 위에 시간과 인물을 지속성의 법칙으로 겹쳐놓는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는 있는데 그것이 ‘무슨 일’인지 ‘어째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현재와 과거와 그 연결고리로서의 역사를 프레임화, 인식 가능한 세계의 범주를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명백히 ‘장기지속’적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 이론에 따르면, 역사는 단일한 관점과 전망에만 근거해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과 전망에서 동시에 쓰여야 하는 것이다. 전자의 방법은 역사를 단순히 연대기적 틀에 끼워 맞춘 채 인과론에만 의존, 사건을 오직 하나의 시간과 방향으로 편집하게 된다는 문제점을 내포한다. 그럴 경우 시공간에 다양한 면면으로 실존해온 역사는 결국 실종되고, 공간성을 배제한 단일한 승자의 시간만이 역사를 대표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시티 오브 갓>은 바로 그 문제점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 영화다. 일부 선택받은 사건들이 자신들만의 계보를 완성하는 동안 남미의 한 역사는 소외되고 배제되어야 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그 기억되지 않는 공간과 시간과 인물들 각각을 계열체라는 공통점으로 묶어 비시간적 요소의 수면 밑에서 끌어올린다. 굵고 질긴 단 한 줄만이 모든 것인 양 뻔뻔히 자리 잡고 있던 역사의 설계도가 사실은 그물망과 같은 복합적인 형태여야 함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제 시간과 공간은 포개지거나 교차되면서 역사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배회를 끝낸 인물과 사건 ― 에피소드를 이루는 각 이미지들 ― 은 그물망의 면 위에 안착할 수 있게 된다. 제빼게노의 악행이 그물의 한 면이고, 마네 갈리나의 슬픈 운명이 또 다른 한 면이 되어 제빼게노의 옆에 위치하는 식이다. 베네가, 텐더 트리오가, 그리고 다른 아이들 모두가 각각 그물망의 빈 자리를 채운다. 이런 방법은 일견 느리고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세계의 풍부한 양상을 두루 살피고 배제되어온 시공간을 역사로 끌어들이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다. 물론 좀 더 완성에 가까운 거대한 형태의 그물망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시티 오브 갓>들의 출몰이 전제되어야겠지만 말이다. 교과서와도 같은 승자만의 연대기, 그 ‘경건한’ 사관들이 기록해 놓지 않았던 구석진 좌표를 영화적으로 ― 살아있는 이미지로 ― 드러낸 <시티 오브 갓>은, 결과적으로 그물망을 메우는 방법에 관한 매우 적절한 예시가 되었다. 부스까페가 말했듯, 멋진 리우 데 자네이루를 담은 그림엽서에 시티 오브 갓은 절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재현’이라는 특성은 부스까페가 줄곧 사진에 천착한다는 설정을 통해 표면화된다. 사진은 ‘존재와 경험’을 환기시키는 이미지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거나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해당되는 진실이 있었음, 혹은 있음을 사진은 증명해준다. 경험자가 사진에서 ‘존재’를 어떤 성격으로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사진이 갖는 의미는 바뀌기도 한다. 지금 현재 브라질에서 이 슬럼가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 ― 파벨라를 잘 아는 카티아 룬드가 공동감독으로 섭외되었고, 촬영에는 갱단 두목의 허락이 따라야 했다. 장소를 섭외하는 과정에서는 총격전마저 벌어졌다 ― 을 염두에 둘 때, <시티 오브 갓>이 사진이라는 장치에 부여하는 의미는 숨겨진 세계의 ‘부각’을 전제로 한 증거 수집에서, 그 증거로서의 이미지라 규정지을 수 있다. 영화 속 사진기자를 향한 부스까페의 열망이 닫힌 시공간 및 그 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스크린에 옮기고자 하는 제작 의도와 호응하는 셈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행정구조에서는 편의대로 땅을 나누는 것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는 행정적 학살이 일어나기 쉽다. 인종이라는 잣대로 인간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놓은 프랑스 이민자 정책이나, 한쪽의 안정적인 질서를 위해 다른 한쪽을 가두어놓은, 브라질 군사정권의 ‘계획된’ 빈부격차 정책 등이 그 예다(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나라 역대 정권들의 정책도 예외는 아닐 테다). 피부색이나 부모의 경제력, 태어난 지역 등 선천적 차이를 빌미로 우열의 구획을 짓는 행위는 필시 누군가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제빼게노가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나이 때부터 총과 마약에 익숙해져야 했을 때, 반대편의 한 아이는 아마도 ‘나쁜 것’으로부터 적절한 보호를 받으며 ‘바르게’ 자라도록 유도되었을 것이다. 마네 갈리나가 건실하게 살아야겠다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을 때, 반대편의 한 젊은이는 그 건실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마음껏 누렸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열악한 환경이 배경이라거나 범죄주체가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그 잔혹한 범죄들에 정당방위를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수평의 공간을 수직으로 분할하는 현실의 법칙이 기획되고 묵인되는 한, 브라질의 파벨라나 프랑스의 방리유 같은 비정한 생태계들은 끊임없이 지구 곳곳에서 암약(暗躍)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방치와 차단과 삭제는 그곳을 낯설고 야만적인 곳으로 규정짓고는 다른 한쪽에 그 대가로 안정적인 삶을 보장한다고 약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약속에는 어디까지나 눈가림과 침묵을 통한 우리의 윤리적인 희생이 전제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티 오브 갓>의 장기지속적 그물망은 정치적이기 보다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관객에게 호소될 필요가 있다. <시티 오브 갓>이 구조적 폭력의 실체 대신 닫혔던 시공간을 열고 구조적 폭력이 빚은 또 다른 폭력에 카메라를 비추는 이유는 바로, 감성이 이성을 자극하는 화학작용이 관객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믿기 ― 믿어야만 하기 ― 때문이다. 부조리한 현장을 목격하는 것이 인식의 틀을 넓히는 데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그 간절한 믿음!


역사의 그물망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질 때 세계의 범위 역시 확장되고 뚜렷해지기를,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간절히 원하는 듯하다. ‘현재 진행 중임을 시사하는 영화적 시점이 얼마나 불편하게 느껴지는가’와 영화적 포토제니(photogenie)의 발현 및 지속 가능성이 정비례 관계에 놓인 셈이다. 영화를 불편하게 본 관객은 따라서 부스까페의 성장기를 분명하게 기억할 뿐만 아니라, 제빼게노를 죽인 소년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부스까페의 말대로, 시티 오브 갓은 ‘가만히 있어도 죽고, 도망가다가도 죽는 곳’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곳(들)은 그렇게라도 ‘추억’되어야 한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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