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日常)이 일상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일상에 소속돼 있기 때문이다. 스쳐지나가면서, 또는 그 안에 머무르면서, 그렇게 우리는 최소한 발 하나는 담근 모양새로 일상을 지탱하고 지탱하다 그 관성으로 대개는 지탱을 멈출 수 없는 지경에 놓인다. 지금은 이 지탱들이 수집되고 DB화되기까지 하는 시대다. 적막한 버스 안을 울리는 '환승입니다-환승입니다-학생입니다'와 같은, 내 경로와 위치와 소속에 관한 증명의 라임들. 이때 일상은 곧 시스템이 된다.

 

태도의 전환. 소속감을 잠시 벗어던지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느끼다 보면, 곧잘 이 일상의 시스템은 희극과 비극의 경계적인 장소가 되곤 한다. 출근시간의 지하철 개찰구를 부감숏으로 잡는다고 생각해보자. 쉴 세 없이 이어지는 삐비빅 소리와 거기에 맞춰 우르르 밀려 쏟아지는 남녀노소. 곧 죽을 줄 알면서 일터로 향하는 같은 표정의 실사판 SCV들, 피로(疲勞)의 톨게이트. 이 부감의 광경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단편영화 <Angst>는 이 같은 관찰자의 시선으로(만) 러닝타임 3분 40초를 모두 채운다. 카메라는 주차장, 건물의 외벽, 골목, 긴 복도, 다리 밑 등을 (때로는 훔쳐보는 듯한 위치에서, 때로는 그늘을 강조한 저노출로) 단지 가만히 서서 응시한다. 여기에 미세한 줌인이나 긴박하고 묵직한 사운드 등의 효과가 더해지며 영화 속 일상적 공간은 마치 시스템-배반적인 누군가에 의해 훑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그 공간들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 속 시선은 희비극의 차원을 넘어 점점 더 불온한 무엇이 되어간다. 우리 외에 살아있는 어떤 존재, 모종의 계략. 그러나 이 불안감이 사건 자체를 일으키지는 않으므로 <Angst>의 이미지들은 결국 설명 불가능한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 이때 설명 불가능함에 들러붙어 이 흔적을 구체적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일상을 위협하는 실재들 ― 시스템 내부에 도사린 불안 요소든 시스템을 노리는 외부의 무엇이든, 일상을 순식간에 무력화하는 바로 그것들 ― 이다. 영화가 남긴 괄호를 채우는 건 늘 현실이 학습시킨 경험 아니었던가.

 

요컨대 일상이 불안한 이유는 첫째, 거기서 발 뺄 수 없음, 둘째, 일상의 행복을 덮을 만큼 일상의 피로함이 크다는 점, 셋째, 일상-시스템을 언제든 찢어버릴 수 있는 저 도사리는 실재들 때문인 셈이다. ⓒ erazerh


 experimental short film <Angst> by Dennis Did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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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초현실이 뒤범벅됐을 때의 어리둥절함. 데이빗 린치의 영화에서나 느낄 법한 그 혼미함을 놀랍게도 지금 여기 2008년 대한민국을 통해 느낀다면, 거짓말일까. 이 모든 해괴망측한 현상들이 결코 영화가 아니라는 데서 한번, 그리고 그것을 접하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욕설을 뱉고 있는 내 입 때문에 또 한번 놀라는, 바야흐로 아주 '어메이징하게' 오싹한 겨울이다.


따지자면 이는 모두 우리의 착각에서 비롯됐다. 지난겨울을 휩쓸던 '무능한 정권보다는 차라리 부패한 정권이 낫다.'는 논리. 이 이상한 명제는 두 가지 착각을 불러왔다. 하나는 '부패'와 '무능' 사이에는 교집합이 없을 거라는, 그래서 '부패했어도 유능은 할 것'이라는 착각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입에 걸린 '유능'이 약자에 대한 고민을 어느 정도는 포함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이다. 전략적 단어인 '실용'이 애매함을 딛고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치인 양 떠올랐을 때, 아마도 이 착각들의 절정은 그 때였을 것이다.


물론 이는 말이 착각일 뿐이지 사실상 우리의 '선택'에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성공이라는 지상과제를 향하는 중에 윤리 따위를 들여다볼 겨를은 없더라.'는 경험명제에 암묵적인 동의를 보낸 주체는 결국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이었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토로하는 누군가보다 토익공부 한 자 더하는 당신이 훨씬 더 현명하고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유의 광고카피가 증명했듯, 성공이 지향하는바 또한 명확했다.


富라는, 눈에 띄는 결과를 향한 이 뜨거운 관심들은 그 자체로 매우 충성스럽기는 했지만, 성공의 '주어'에 관한 질문은 최대한 삼갔다. '일단 나는' 성공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는 강박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구조를 바꾸려 드느니 차라리 그 꼭대기로 향하겠다는, 그것이 그나마 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만성적인 절망과 박탈감 따위 아랑곳 않을 수 있는 '부자'가, 그야말로 전지전능함의 표상이 된 것이다. 자본으로 서열을 매기는 시스템은 그렇게 영원히 부서지지 않을, 차라리 폼 나게 편입하고픈 대상이 됐다. 바야흐로 '살아남은 놈이 곧 윤리적인 놈'인 세상의 도래였다.


그 결과, 우리는 수직적 사고로 가득 찬 야심만만한 CEO를 대한민국의 수뇌 자리에 들어앉혔다. 예상대로 그의 원칙은 확고했다. 그에게 '다름'과 '차이'는 '변명'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가난한데다 '좌파'이기까지 하다면, 안타깝지만 그것은 순전히 당신이 남들보다 덜 열심히 살았고 또 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은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 죄스러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이 말 같지 않은 논리가 현행태로 횡행하는 곳이 바로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모든 분야에 '경쟁력'을 갖다 붙이고 그 결과를 세로로 나열하고픈 천박한 소망이 제대로 작동 중인 셈이다.

MB는 이른바 '불도저'로 불린다. 불도저는 묵직하게 밀어붙여 눈에 띄는 성과물을 만들 줄 안다(물론 게 중에는 오직 쓰레기 생산에만 힘쏟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 깔아뭉갰을 벌레나 잡초 등의 생명체들에, 불도저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성급했다. 모두가, 아니 일단 나는 불도저에 탑승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 밑에 깔릴 벌레나 잡초는 아닐 줄 알았다. 아니면 그 존재 자체를 묵인했거나. 주지해야 할 한 가지 사실. 지금의 시스템이 계속되는 한 깔아뭉개지는 생명체의 수가 줄어드는 일은 결코 없을 것라는 점. 늘 그랬듯이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물론, 4년 후에도 심판할 나라가 남아있다면.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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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내부의 수직적인 질서가 굳건해야 한다고, 종종 믿긴다. 이 믿음이 강하게 작용할수록 구성원 간 소통이 일방향 일색으로 흐를 가능성은 더 크다. 창조적 사고 따위를 주고받는 것이 흥미로울 리 만무하다. 적자생존. 논의할 줄 아는 사람은 떠나고, 명령을 전달하거나 수행하는 데 충실한 기계적인 개체만이 남겠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을 그 안에서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될 테고.

이 즈음 되면, 갈 길을 잃은 채 제 몸집만 불리고 있는 욕망 덩어리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시스템은 이 난폭한 녀석을 낳았지만, 방관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식을 부정하는 순간 어미도 무너지니까. 그래서 동원되는 것이 '은폐'이고 '위장'이다. 시스템은 굳게 믿는다. 그것만이 메스를 대지 않고도 내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공포의 재생산'은 그 중 가장 효과적이고 유서 깊은 정책이다. 임의의 울타리를 치고 그 바깥 존재들에 '공포'라는 혐의를 씌움으로써, 현재 시스템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식이다. 욕망이 선(善)의 실현을 위한 정신으로 포장되고, '다름'이 '우열'로 치환되는 일은 그렇게 해서 벌어진다. 시스템의 생존기는, 종종 이토록 악랄하다.

요컨대 울타리는 늘 임의로 쳐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 바깥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헤아리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내 위치가 아니라 태도다. 이를테면 울타리의 폭력성을 감지하려는, 그래서 시스템의 불투명성을 늘 의심할 줄 아는 태도. 미국의 국가적 폭력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에 관한 다큐멘터리 <택시 투 더 다크 사이드>는 바로 그 태도의 일환이다. 많은 부조리한 시스템들이 미 국방 시스템을 표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울타리에 동의하고 그 안에 속하는 데 만족하는 자체로 당신은 괴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미. ⓒ erazerh


덧, 대한민국의 비극. 그 같은 시도가 불온할 뿐만 아니라 피곤하다고까지 믿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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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던 유형의 부모. 자식에게 '잘 나가는' 직업(판사, 변호사, 의사 따위)의 길을 강요하는 부모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수직 정렬된 직업군에 사람이 '끼워 맞춰지는' 현실에 내가 놓여있다고 해서, 내 아이 앞에 있을 무한한 가능성마저 제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요 며칠새 생각에 변화가 왔다. 가능하다면, 소위 그 잘 나가는 직업군으로 아이를 유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물론 강요 따위는 없도록 해야 겠지만.

자본 서열의 저 남단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시스템은 곧 거대한 불합리다. 이것을 반복 학습해야 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이런 따위의 좌절감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부술 수 없다면, 그나마 덜 부서지는 쪽이 낫다. 불합리를 '아는 것'과 '겪는 것'의 간극을 새삼 깨닫는 요즈음, 조금은 힘에 부친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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