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영화 <>(2010)에서 미자가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하는 숏이 참 좋다.

 

미자야 이리와라며 부르는 언니, 그 손짓, 반쯤 쳐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내가 정말 예쁘구나라고 생각하는 서너 살의 미자. 그리고 그 생애 최초의 기억을 부여잡고픈 예순여섯의 미자.

 

영영 오지 않을 순간, 그러나 오지 않음이 명백해질수록 우리 뇌는 그 시간을 더 자주, 이토록 참 잔인하게도 불러낸다. 시간이 만든 간극과 그 가슴 시림을 이 숏만큼 정갈하게 담아낸 이미지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었다.

 

영화 <시>

 

그리고 10, 놀랍게도 영화 <더 파더>(2020)의 최종 씬이 그 가슴 시림 비슷한 걸 다시 한 번 전해줬다. 내 우주가 뭉개져 점이 되고 끝내 무()가 되는데, 수치스럽게도, 그에 따른 수치심과 분노와 당혹감마저 명멸하다 이내 증발해버리는 간접의 지옥.

 

모든 게 괜찮을 거예요.”

 

텅 비어버린, 오직 원형으로서의 포근함만을 갈구하게 된 머릿속은, 저주에 걸린 것 같지만, (실은 말이야) 어쩌면 축복일지도 모른다. erazerh

 

영화 <더 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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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


우연히 보게 된 웹툰. 다른 회는 그저 그런 것 같은데 이 에피소드만큼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원래는 까만색 지금은 회색인 개 한 마리, 과거에는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현재는 집안 소품과 다름없는 신세다.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법이거나 말거나 녀석은 사랑 받던 그때 그 시절을 자꾸 소환해댄다. 물질적 시간의 역방향으로 흐르는 머릿속 시간. 어마어마한 간극이 생길 수밖에(나는 바로 이 간극 때문에 삶이란 녀석이 본질적으로 비극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행복해!’ 라는 주문을 늘 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게 나라는 인간).

같은 맥락. 나는 <시>에서 미자가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하는 숏이 참 좋다. “미자야 이리와.”라고 부르는 언니, 그 손짓, 반쯤 쳐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내가 정말 예쁘구나.”라고 생각하는 서너 살의 미자. 그리고 그 생애 최초의 기억을 부여잡고픈 예순여섯의 미자. 영영 오지 않을 어떤 순간, 그러나 오지 않음이 명백해질수록 우리 뇌는 그 시간을 더 자주, 이토록 참 잔인하게도 불러낸다. 세월의 흐름이 만들어버린 간극, 그로 인한 가슴 시림을 이 숏만큼 간결하고 담백하고 또 오롯이 담아낸 이미지를, 나는 또 만날 수 있을까. ⓒ erazerh



# 1995년,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던 그때. 꼬리를 참 신나게도 흔들던 녀석의 첫 모습을 난 아직 기억한다. ‘이게 개야 천사야!’했을 정도였지 아마. 참 많은 시간을 녀석과 같이 보냈다. 이제 17살. 계륵이 돼버린 아이(그래도 넌 행복한 개임. 웬만한 사람 같으면 너 똥칠하는 거 못 견디고 이미 내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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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이마주 게시판에서 '내 인생의 영화 30편'이란 글을 보고 재밌겠다 싶어 나름 고민 끝에 꼽아본 목록이다(30편까진 아니고, 베스트 10). 영화적으로 이들 작품보다 훨씬 빼어난 것도 후보에 있었지만, 기준이 '내 마음을 뒤흔든 정도'이다 보니 작품성 목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 물론 10편 또한 완성도로 따질 때 보통 레벨에서 논의될 영화들은 아니다만(가나다 순, 괄호 안은 감독).


도니 다코(리처드 켈리)

마더(봉준호)

멀홀랜드 드라이브(데이빗 린치)

베티 블루(장 자크 베넥스)

사랑의 추억(프랑수아 오종)

시(이창동)

씨클로(트란 안 홍)

엘리펀트(구스 반 산트)

엘 토포(알레한드로 조도르프스키)

증오(마티유 카소비츠)


이 중 단 한 편을 꼽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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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영화 베스트 10 + 20자평. 국내 상영작, 가나다 순.


<방가? 방가!> 남의 쪽박 함부로 깨지 않는 세상이 진짜 유토피아.

<셔터 아일랜드> 미치는 게 차라리 당연한 미국, 남자. 인셉션보다 훨씬 낫다.

<시> 망각의 강 위로 기어이 피워 올린 꽃/시/얼굴. 가슴이 미어져, 이창동 최고작.

<시리어스 맨> 요란 떨지 않으면서 삶의 요란스러움을 주무르는 경지.

<예언자> 텅 빈 도화지에 아로새겨진 범죄 계보학. 조금 더 묵직했더라면.

<옥희의 영화> 결국은 닮아버릴 다름들, 그 사이에 서서. 홍상수의 신세계.

<킥 애스: 영웅의 탄생> 매끈하면서도 B무비 감성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경우의 이상적인 예.

<하얀 리본> 가짜 죄의식이 진짜를 몰아내다. 이성을 가장한 미토스, 그 광기.

<하하하> 두 개의 숟가락, 하나의 찌개. 적어도 솔직은 했던 그 맛 그 여름.

<허트 로커> 풀 메탈 자켓과 지옥의 묵시록 사이의 어느 지점. 전쟁-기계 新 보고서.


이 중 올해의 한 편은, 단연 이창동의 <시>다. 미학적으로 정점에 달한 이 영화는 스토리텔링 면에서도 역대 가장 창조적이다. 요컨대 망각되고 있는 한 죽음이 또 다른 개인의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에 관한 이야기. 이 죽음은 영화 후반부 카메라-시선 숏을 통해 순간 ‘꽃’이 됐다 이내 증발하는데, 그야말로 영화적 마법의 경이로운 극단이 아닐 수 없다. 짜릿하고 격정적이고 먹먹하고 뭉클하다(같이 본 아내는 한참을 울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운 건 <파이란> 이후 처음이다). 이는 <400번의 구타>나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숏조차 미치지 못했던 영역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이 소녀의 얼굴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래도 이창동은 간격/리듬만으로 심금을 울리는 신공을 터득한 것 같다. <시>는 시 쓰기, 또는 이미지 그 자체다. ⓒ erazerh


2009년 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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