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러난 진실들을 쥐고서 최종 숏으로

 

 

※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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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의 예술이다. 인물들은 카메라의 시선에 상시 붙들려 있지만, 짐짓 이를 모른 촬영 현장만이 세계의 오롯한 전부인 양 꾸며댄다. 어쩌면 누가 더 시치미를 잘 떼느냐는 시합. 그렇게 이 쌓이면, 한 편의 영화는 그 자체로 독립된 단일 체계, 즉 처음과 끝을 간직한 유사-현실 덩어리가 된다.

 

이 독립성과 완결성이야말로 건드려선 안 될, 이야기의 본질이 아닐까. 이야기는 외부에서 널리 보이고 읽히되 절대 간섭받거나 변경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훔쳐보고, (현실과) 겹쳐보고, (원본의 수정 없이) 이리저리 만지작거릴 거리가 이야기인 셈. 이때 관객의 자리는 프레임 바깥에 깔려있으며, 러닝 타임 내내 안으로 건너올 수 없다. 일반적으로는.

 

 

이 열릴 때가 있다. 배우가 카메라를 쳐다봄으로써 인물과 관객을 대면케 하는 것이다. 대개 훔쳐보기라는 근본 규칙을 깨야 할 만큼 간곡한, 어떤 신호를 프레임 바깥으로 내보내고 싶은 경우다. 그중에서도 <살인의 추억>(2003)의 최종 숏은 효력이 너무나도 강렬해 신호 보내기의 롤모델로 불리는 게 마땅할 정도.

 

송강호(박두만 역)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파르르 떨며, 한쪽 눈을 살짝 찌그린 채, 카메라(관객)를 쏘아본다.정의사회 구현을 간판으로 내건 나라, 짝퉁으로서의 평화적 구조를 무대 삼은 범인. 거기서 비롯된 울분을 박두만의 마지막 얼굴에 응축해놓은 봉준호 감독은, “범인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리라 생각해서이런 엔딩을 준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봉준호라면, 이 펄럭거리는 숏이 스크린을 찢고 나와 진범을 휘감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살인의 추억>의 최종 숏

 

 

, 한 번 열린 문은 닫을 수 없다. 관객을 바라봄으로써 영화와 실재 사이에 심리적이되 실질적인 다리 하나를 놓은 셈. 애초에 특정 사건을 직접 끌어안은 영화의 숙명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현실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다시 현실로. 그런데 이 현실에 천지개벽할 변화가 생겼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밝혀졌고, 애먼 사람 하나가 20년간 잡혀있었다.

 

10건으로 알려진 화성 연쇄살인사건’, 14차에 걸친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공식 명명(201912)

 
윤 모 씨, 8차 사건 범인으로 검거돼 20년간 죄 없이 복역 후 2009년 가석방(현재 재심 진행 중)

 

이 정도라면 영화 역시 한 번은 새로 고침해봐야 하지 않을까. 현실에서 영화로, 인식의 다리를 다시 건너보자. 물론 이 시점에서 봐도 숏들의 배치와 호흡은 경이롭다만, 떼 내기 어려운 의문점이 자꾸만 들러붙는다. 최종 숏이 클로즈업한 얼굴, 그 신호 보내기라는 막중한 임무를, 과연 박두만이 짊어져도 되느냐는 것. 요컨대 자격에 관한 물음 말이다.

 

- 윤 씨, 불법 체포·감금 가혹행위 고문 훈련된 자백 녹음 등 강압 수사에 못 이겨 (8차 사건) 허위 자백
- 윤 씨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데 결정적 증거였던 국과수 감정서가 허위로 조작된 사실 확인
- 경찰, 이밖에 양손이 줄넘기로 묶인 초등학생(8)의 시신을 발견하고도 숨겨 단순실종 처리형사계장과 형사 1명에 대해 사체은닉과 증거인멸 등 혐의 적용
- 화성 8차 사건 말고도 억울한 사연 '수두룩(연합뉴스. 201910)

 

비극의 백광호. <살인의 추억>

 

이토록 잔혹한 폭압과 위법은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박두만을 중심으로 충실히 재현됐다.(518일 재심 첫 공판에서 영화의 이 부분 일부가 상영됐다) 그는 손수 발자국을 찍어 증거를 생산했고, 이 타이밍이다 싶으면 고갯짓으로 조용구에게 (용의자를) 군홧발로 짓밟으라 지시했다. 그러면서도 무능과 조작으로 잘려나간상사와, 폭력의 증거로서 결국 다리가 잘려나간용구와 달리 영화 끝까지 살아남는다. 자연스럽게. 무능과 폭력에 한 다리씩 걸친, 한통속 혹은 중심임에도.

 

이는 영화가 박두만 안에 시대의 후진성과, 진범을 잡고자 하는 절절한 욕구를 동시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넉살부터 처절함까지 양 극단을 횡단할 줄 아는 송강호의 표정이 그걸 가능케 했음은 물론이다. ‘살이 불어터지도록종일 목욕탕에 들어앉아 남들의 그곳이나 보고 다닐 때, 강변에서 링거를 맞으며 지치고 고단한 ·외면을 풍경으로 드러낼 때, 유력 용의자(또는 영화를 보고 있을 범인)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며 냉소할 때, 우리는, 미흡했지만, 악의는 없는, 투박한 진심을 본다.

 

이건 아마도 당시 형사들의 갖가지 결을 두루 섭렵해야 하는, 극의 중심에 놓이도록 설계된 인물로서의 필연적 복합성일지도 모르겠다. 용구도 서태윤도 맡을 수 없는 자리. 그렇게 박두만은 후졌지만 호감은 가는, 이런저런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허용되는 캐릭터가 됐다. 물론 이 영화적 장치는 충분히 수용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숏에 이르러서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깊이의 얼굴-응시마저 창조케 했다.

 

송강호의 내·외면. <살인의 추억>

 

 

이후로 한참이 흐른 2019, 31년간 은폐된 시신의 존재가 떠올랐다. 8살 아이의.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껌뻑거림들. 진정하고 초점을 다시 잡아보자. 이제 후진 시스템과 후진 사람들 한결 더 도드라져 보인다. 재차 투박한 진심까지 가려면 전처럼 악의는 없는따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식어가 필요한데, 현실이 그걸 허락할 것 같지는 않다. ? 눈을 닦고 보니 그들의 목표는 진범 찾기가 아닌 자기 자리 보존이었으니. 악의가 없기는커녕 흘러넘칠 지경이다.

 

이렇게나 맹렬한 보신(保身)주의라니, 이러면 한나 아렌트의 저 유명한 진부한 악이상 가는 지위를 부여해드려야 마땅하다. 상상력이 모자란, 그저 시대의 부속품이 아닌, 이를테면 시스템의 설계자 같은.

 

물론 박두만은 특정 형사 한 명이라기보다는 형사들 면면의 집합체에 가깝다. 하지만 정육각형에 가까웠던 특성 중, 적어도 선의(善意)항목은 새로 드러난 사실들에 찔려 움푹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동시에 최종 숏의 강렬함이 그 선의로 마감된 박두만의 캐릭터성에 크게 빚졌음을 상기해보자. 이제 나는 그에게 분노자로서의 지위가, 외화면을 쏘아볼 송신자의 자격이 더는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 그에게 어울리는 곳은 프레임 바깥, 응시를 받아야 할 자리, 즉 범인의 근처 어딘가일 뿐이다.

 

피해자들은….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은 여전한 걸작이다. , 특정 사건과 동기화됐다는 영화적 특성상 현실과의 호흡을 위해 세포를 지속해서 열어두고 있을 뿐. 시대의 맥을 그토록 잘 짚었는데, 지금 보니 그 땅 위에 진범의 것 외에도 악랄함이 층층으로 쌓인 형국. 상상의 달인 봉준호도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앞으로 악행의 구조는 점점 더 디테일하게 드러날 것이다. , 딱 보면 감이 온다던 그들은, 공소시효가 소멸돼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춘재도 마찬가지. 밥도 잘 먹고 다니겠지. 말 그대로 살인의 추억.

 

하수구 안에는, 야산에는, 구겨져버린 여성들이 아직도 있다. 8살 아이를 포함한.

 

우리는 완전히 실패했다. erazerh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박두만에게는, 응시할 자격이 있었을까

[살인의 추억] 드러난 진실들을 쥐고서 최종 숏으로 | ※ 『최종 S의 비밀』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Sequence), 신(Scene), 숏(Shot)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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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영화의 매력은, 그 원천을 굳이 따지자면 인물들의 -지층적 행보에 있.

 

※ 이하 <기생충> 포함 봉준호 영화들의 스포일러

 

 

그 자유분방함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괴물>(2006)이다. <괴물>에서 강두와 괴물은 장르적 기승전결과 무관한 때 맞닥뜨림은 물론, 행동 패턴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복지부동의 공권력보다 날래고 유려하다. 영화 속 공간을 부감숏으로 따라간다면 이 둘의 발걸음은 아마 무규칙한 점들로 찍힐 것이다.

 

즉 영화 속 세계가 제시한 질서에 순응역행도 않는, 요컨대 떠돎같은 것. 떠돎의 운동은 낡은 질서의 후진성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인물들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2007)에서 주인공 수영은 모두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느라 옴짝달싹 못 할 때 홀로 걸어 다니는 경험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훗날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봉준호 영화에서는 이 떠돎이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같은 리듬으로 호흡하지 않는 무덤덤함이 돼 그 구조를 민망한 것으로 만들고는 한다. <지리멸렬>(1994)에서 위선자 3인이 TV 안에서 토론을 펼치는데, 그중 한 명 때문에 곤란을 겪었음에도 신문배달원은 TV 화면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토론이 토론으로서 가치 판단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모양.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렇게, 세속적 위계에 붙들리지 않음으로써 위계의 조악함을 발가벗겨버리는 지위를 종종 누려왔다.

 

봉준호의 단편 명작. <지리멸렬>

 

<마더>(2009)에 이르러 봉준호 감독은 인물들의 이 기존 경로를 마침내 구부러뜨린다. 앞선 주인공들은 위선적인 구조에 발목 잡히면서도 제 삶의 리듬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불합리한 구조를 괘념치 않는 유체적 속성 덕에 그 좌충우돌 행보는 차라리 상식에 가까웠다. 그러던 게 <마더>에서 도준 엄마가 관료적 시스템이 내린 눈먼 결론에 마침내 피로써 눈물로써 동의해버린 것이다.

 

살인 - 엄마…없어?” - 오열.

 

진범을 찾는다며 전작들의 인물과 흡사한 궤적을 그리던 이 엄마는 그렇게 다른 길로 접어든 후 꼭꼭 숨어버린다. 가난을 잡아먹은 가난()에게는 어떻게 눈에 안 띄고 살 것이냐가 관. <마더>의 끝부분을 송강호의 눈같은 호소하는 시선 대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덩어리진 음영이 장식하는 건, 필연과도 같았다.

 

서사적·미학적으로 완벽했던 <마더>의 엔딩 숏

 

이 같은 -지층적 행보가 실종된 것은 <설국열차>(2013) 때부터다. 인물들은 더 이상 떠돌지않았다. 영화 속 시스템에 순응또는 역행만 함으로써 운동성이 모종의 회로기판 안에 갇혀버린 형. 그래서 좌충우돌 질주는 해대지만 행보의 결 자체는 강자/약자의 논리 회로 위에 매끄럽게 정렬돼버린다. 시스템 안팎을 넘나들며 그 시스템이 얼마나 후졌는지를 전해오던 떠돎의 진동은, 이때부터 감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기생충>(2019)에 이르러 이 회로로의 수렴은 한층 더 강화됐다. 무신경하게 TV를 끄던 인물들의 자리는 공짜 와이파이를 찾고 세상에 접속하며 뉴스를 챙겨보는 이들이 차지했다. 상승/하강의 권역 바깥에서 행동의 나래를 펼칠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 그럴 수도 있겠지.”

 

유쾌하지 못한 느낌이 스멀스멀 번진 건 가족들의 사고방식 및 행보에 어떤 생략이 감지될 때부터다.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게 힘들고 구질구질한 것바퀴벌레스러운 침투력과 뻔뻔함을 납득하고 체화하는 것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는 문.

 

그래, 가난하네, 알겠는데, 그런데 이 가족은 왜 이러는데?

 

갑자기 분위기 연쇄사기꾼. <기생충>

 

그렇게 가난과 뻔뻔함이 점프 컷 수준으로 깨진 채 붙어있다 보니 반지하 창틀을 담은 숏들은, 마치 <버닝>(2018)의 햇빛 조각처럼, 어떤 편협한 시각에 잠식됐었다는 인상마저 남긴다. ‘여기서 매일매일 이런 프레임을 보고 살면 높은 확률로 뻔뻔함을 감당할 수 있게 되겠지’, ‘반지하서 이러고 살다 보면 부모고 자식이고 서로 듣는 데서 욕지거리도 할 듯’, ‘, 그러니 (나의) 코엔식 소동극을 위해 이제 트리거를 당겨봐따위의 잔향들.

 

그러니까 반지하방에서 실제로 그 프레임을 보며 눈 감고 떠본 적 없는 이가‘지층 살이 체험판’ 정도로 다소의 영감을 얻고는, 이를 (상 주는 사람들이 선호할 법한) 핏빛 소동극까지 적당히 끌고 간 게 다라는 결론, 말고 나는 무엇을 건질 수 있을까. 결국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행보의 반경 또한 예측 가능한데 여기에 논리의 비약마저 작동된 모양. 이제 후진 건 세계의 부조리한 질서 같은 게 아니라 각자도생하는 인물들, 그 자체가 됐다.

 

영화를 구성하는 유니크한 입자로서의 인물들, 부조리한 틈 하나를 파고드는 날카롭고 불온한 상상력,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봉준호 고유의 것들의 3연속 실종. 이래서는 이제 나는설레기가 어렵다.

 

 

물론, 이 글은 계획에 없었다. erazerh

 

밥은 먹고 다니냐. <기생충>

 

 

* 무슨 말이 구구절절 이렇게나 많은지 모르겠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케이크 위에 놓인 딸기 하나만으로도 그 깊은 여운을 남겼던 감독이.

 

* vs , 뭐 이런 말들 나오는데 이미 <마더>에서 을과 을의 싸움(?)은 그 연유와 결과와 비극성에서 정점을 찍은 바 있다. <기생충>의 가족들은 을보다는 을질에 가깝다.

 

* 팬티를, 거기서?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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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영화의 매력은 단지 약자/강자라는 구도에 있지 않다. 그의 작품에는 이 구도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상징계와 실재계의 만남, 미끄러짐, 환기가 있다. 이는 (봉준호 영화 특유의) 부조리가 자연화된 관료적 위계에 포섭되지 않는 인물들 본연의 리듬을 통해 이뤄진다. 그들의 탈정치적 행보가 위로받아 마땅한 실재로 자리 잡을수록, 시스템의 비열한 구조가 점점 더 발가벗겨지는 식이다. 봉준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최종 숏, 즉 강렬한 환기의 이미지로 기어이 나아갔다.

 

반면 <설국열차>에서는 등장인물들의 경로가 명명백백하다. 윌포드를 끝장내고 엔진을 차지하는 것. 따라서 강자/약자로 이뤄진 착취 시스템은 훨씬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인물들은 그 위계에 역행만 함으로써 되레 시스템의 논리 안에 갇힌다. 순응이든 저항이든 행보 자체가 가지런히 정렬돼버린 셈이다. TV의 거짓에 분노하기는커녕 밥 먹는 데 방해된다며 무심하게 전원을 꺼버리던, 그 탈정치로의 출구가 이 열차 안에는 없다. 이를테면 재기 발랄한 시간의 부재.

 

봉준호는 어느 인터뷰를 통해 <설국열차>가 전작들과 전혀 다른 영화임을 밝힌 바 있다. 기차가 무대인만큼 '좌충우돌'보다는 '일방통행'의 형식을 택한 듯하다. 기존 작품들이 '오인'과 '미끄러짐'의 영화라면 <설국열차>는 '전진'(또는 전환)의 영화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전개가 (봉준호 치고는) 지나치게 평면적인데다 급하기까지 하다. 이미지가 비운 자리를 자꾸만 설명이 메운다. 그러다보니, 시스템 안에서의 혁명이 무의미하니 판을 갈아엎고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메시지조차 거대한 훈계처럼 들린다. ⓒ erazerh



* 송강호는 굳이 나올 필요가 있었나 싶고, 고아성은 연기를 못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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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의 이전 대사들과 궤를 달리하는 한마디. “언제는 귀엽다며, 이 씨발년아.”가 불쑥 튀어나왔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영화가 이질적인 무엇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는 선언과도 같은 그 대사가, 나아가 관객의 예정된 불평에 부치는 박찬욱의 변(辯)처럼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언제는 거장이라며, 이 관객님들아.’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왜 박찬욱은 잘 나가던 내러티브를 작정하고 일그러뜨렸을까. 서로 다른 두 개(또는 세 개)의 박찬욱표 영화가 위태로이 엉겨 붙은 듯한 이 구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송강호는 한 인터뷰에서 이 불균질과 관련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달리의 그림은 경직된 현실에 틈을 내고 그 틈을 통해 어떤 관념이 흐르도록 만들 뿐, 그 자체로 불균질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어찌됐든, 너무 기괴한 나머지 아름답기까지 한 몇몇 시퀀스에도 불구하고 ‘복수는 나의 것 > 올드보이 > 친절한 금자씨 > 박쥐’라는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다. 불친절해서가 아니라 납득할 만한 ‘불친절의 당위성’을 아직 찾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악취미’의 향연 따위를 원인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 그것은 박찬욱에게서 이미 성취한 자의 과시욕을 읽어야 하는, 조금은 가슴 아픈 일이 될 테니. 설마 박찬욱이 <로스트 하이웨이>를 두고 본인이 했던 말, 즉 “자기 자신의 모티브들을 재탕 삼탕 우려먹는 안이함. 미완성 각본으로 폼만 잔뜩 잡는다.”를 몸소 실행했을까. 일단은, 조금 더 고민해보자. ⓒ erazerh


# 박찬욱의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건, 누가 뭐래도 <삼인조>다. 그 아름다웠던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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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당신, 더 일해라’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 강인구(송강호)는 폭력과 배신과 약육강식의 현장 한 가운데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게다가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한 대가(?)로, 그의 배는 누군가의 칼이 호시탐탐 노리는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린 상황. 위태와 권태 사이를 오가던 하루하루는 결국 사태를 눈덩이처럼 불려서는 강인구를 그 속으로 밀어 넣고야만다.

이기적인 욕망과 그에 따른 사투로 흘러가는 세계. 느와르가 곧잘 다루는 공식인 ‘파멸로 이르는 외길’은 <우아한 세계> 속 조폭 세상에도 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강인구가 자꾸만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것이 장르적으로 타당한 수순인 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을 느와르의 외피만으로 뭉뚱그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인구의 행보는 장르 특유의 음울한 포장이나 세계의 본질로서의 비극성 따위와는 별 상관없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다른 가장처럼 생계에 관한 고민으로 가득한 강인구는, 오직 ‘살림의 완성된 단계’를 향해 움직일 뿐이다.


이처럼 <우아한 세계>에는 조폭이라는 집단성과 생계라는 대중적 고민이 동시에 존재한다. 느와르의 흐름을 크게는 유지하면서, 그 흐름의 근원을 ‘잘 먹고 잘 살아야한다는’ 1차 집단적 강박에 두는 셈이다. 그 덕에 강인구를 둘러싼 상황이 장르적 평면성의 함정을 비껴나 보다 입체적인 형태로 부풀어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상황이 입체적이라 함은 곧 강인구가 시달려야하는 고충들이 여러 겹임을 의미한다. 언제부터인가 강인구는 ‘내 가족과 함께 보다 좋은 집에서 보다 잘 먹는 것’이 ‘우아한 세계’라는 자본주의의 공식에 익숙해져왔을 것이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조폭으로서의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최선을 다해온 강인구. 그러나 우아한 세계의 구축을 향해 불철주야 뛴 결과로, 그는 우아함의 자격을 잃게 되고 또 다른 시련을 감내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고 만다.

‘먹고 먹힘’으로 진행되는 조폭 세계는 이 땅에서 살기 위해 용쓰는 것 자체가 우아한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아름다운 형상은 아님을 (‘아름답다 아름다워’라는 반어법) 강조하는 수단일 터. 어디까지나 ‘럭셔리’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환상은 세상에 찌든 강인구라는 ‘사람’을 버리고는, 돈 버는 ‘기계’로서의 강인구를 그 빈자리에 앉히기에 이른다. 인간을 편의에 따라 분류하거나 도구로 치환하는 일이 가족 사이에서마저 벌어지는 풍경. 우아한 세계라는 판타지와 가족애라는 판타지는 그렇게 뒤엉키고, 한 남자의 사투는 그것들의 자양분으로 활용될 뿐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그 비정함은, 강인구에게 또는 우리에게, TV를 통해 오늘도 내일도 웃으며 말을 걸어올 테다. 열심히 일한 당신, 더 일하라고.


생활 누아르와 송강호라는 배우

영화 <우아한 세계>는 스스로를 ‘생활 느와르’라는 복합명사로 부른다. 사실 우리가 ‘생활’이라 부르는 단어 밑에는 꽤나 많은 사건과 그에 따른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있다. 희극과 비극을 수시로 넘나들며 생성되는 변화무쌍한 표정들의, 무한한 조합. 우리네 일상생활의 본질은 바로 그 조합에 있지 않을까. 따라서 ‘생활 느와르’를 표방한 <우아한 세계>가 생활을 웃음과 슬픔이 오가는 폭넓은 이야기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물론 그 독특한 장르용어의 활용은 송강호라는 배우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송강호는 울면서 웃을 수 있는, 혹은 웃으면서 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왼발은 비극 오른발은 코미디, 그냥 걷는 리듬으로 찍었다”는 <괴물> 또한, 송강호의 그러한 이미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미 여러 곳에서 언급됐듯이, 강인구라는 인물에서는 그간 송강호가 선보였던 캐릭터들의 흔적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후반부 노 회장과 조우했을 때 횡설수설하는 모습은 “죽긴 죽었는데, 살았거든요?”라는 말하는 <괴물>의 박강두와 닮았고, 모든 상황이 뒤엉켜 벽에 부딪혀버렸음을 실감하는 표정은 <살인의 추억>에서의 박두만의 얼굴과 겹쳐진다. 또한 가차 없는 행동력과 안 풀림에도 무던히도 애쓰는 모습은 각각 <복수는 나의 것>과 <반칙왕>을 떠올리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무식하면서 용감하다는 점에서 강인구는 <넘버 3> 조필의 나이 든 버전이다.

이러한 필모그래피의 추억은 일견 배우 이미지의 동어반복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강인구에 배인 송강호의 과거는 단지 나열되는 데서 그치지만은 않는다. <우아한 세계>에서의 송강호‘들’은 서로 충돌하고 또 한데 어우러지면서, 삶의 복잡다단한 리듬을 살아있는 표정으로 옮겨낼 줄 아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그 생생함이 스크린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순간, 송강호라는 배우는 피곤한 대한민국 서민의 ‘몸-얼굴’로 비로소 녹아들게 된다. 비록 오늘은 울더라도 내일은 웃고 싶은, 그래서 여전히 ‘생활’의 현장 한 가운데에 서있는 바로….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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