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볼 때와 두 번 이상 볼 때의 느낌이 크게 다른 영화가 종종 있다. 케이블에서 다시 만난 <미스트>가 꼭 그렇다. 뭐랄까. 슈퍼마켓에 갇힌 군상의 행태를 향했던 내 관심이 이번에는 그들이 거기 갇혔다는 상황 자체로 옮겨졌구나, 싶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얼마나 부조리한지에 관한 이 기가 막힌 플롯을 예전에는 왜 못 알아봤을까. 요컨대 여기에는 ‘사람 > 자연’이라는 공식의 완전한 ‘역전’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 < 자연.’ 지구라는 공간을 참 오래도 점령해온 인간계가, 영화에서는 ‘안개를 동반한 어떤 세계’로 재현된 셈이다. 슈퍼마켓에 갇힌 사람들의 처지에서 인간계 바깥으로 밀려나버린 현실의 존재들이 감지되는 것은 그래서다. 마찬가지 이유로, 안개 너머로 들어가면 죽어야 하는 영화 속 설정과 인간 세상으로 넘어오면 죽어야 하는 영화 밖 현실은, 무척이나 닮았다.

한정된 공간을 수직적인 관념으로 나누는 일은 늘 누군가를 지워버리기 마련이다. 공간에 스민 권위가 공간의 물리적 크기는 물론 개체수마저 임의대로 결정짓기 때문이다. <미스트> 끝 무렵에 등장하는 거대한 생명체는, 아마도 인간 고유의 그 전지전능함이 영화적 상상력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동시에 녀석의 발밑에는 너무 놀라고 두려워 도망칠 엄두조차 못 내는 사람들이 놓이는데, 이로써 현실의 ‘위압적인 것’과 ‘초라한 것’에 관한 오롯한 상하반전 숏이 완성되는 셈이다. 말 그대로 ‘역지사지의 구도.’ <미스트>가 부조리한 실재를 경유하는 판타지임은 바로 이 숏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멧돼지가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떨거나 ‘도둑’ 고양이가 동네를 더럽힌다고 구시렁거리는 따위의 목소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쉴 곳을, 먹을 것을, 줄기차게 빼앗은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공간에 얽힌 힘의 불균형은, 이렇듯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데다 그로 인한 부작용이 인식조차 안 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끔찍하다. 더욱이 마치 지금까지는 안 그래온 양 이제는 제대로 힘써보자고 국가가 주도하는 판이다. 누군가 말한다. 산을 깎고 강을 통제하면 모두가 잘되는 ‘녹색성장’이 올 거라고. 동족마저 속이려는 이 삼류 말장난에 비하면, <미스트>의 괴물들은 차라리 자비롭기가 부처님 수준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은 늘 영화보다 끔찍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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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으며, 또 슬펐던, 2008년도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8 영화 베스트 10을 꼽고 20자평도 곁들여 봤습니다(국내 상영작, 가나다 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세상만사 어차피 욕망과 욕망의 충돌. 가장 무서운 건 이성적인 척하는 비이성.


<다크 나이트> 희대의 캐릭터 탄생. 웃으면서 울고 파괴하면서 창조한다.


<렛 미 인> 소년은 어떻게 소녀를 위해 살인을 하게 됐는가. 일종의 프리퀄. 최소한 순수하지는 않다.


<미스트>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 공포의 진짜 창조자는 늘 인간.


<스위니 토드> 모든 걸 잃어버린 한 남자, 모두가 죽어야 끝날 노래를 부르다.


<스턱> 간결하고도 명쾌한, 인간 먹이 피라미드의 작동 원리.


<영화는 영화다> 현실을 무대로 살인을 연기하는 기괴한 엔딩 시퀀스는 압권!


<월-E> 2008년 스페이스 ‘러브 오디세이’


<이스턴 프라미스> 유아적인 자들이 젠체할 때 나타나는 비극. 인류의 여전한 오류.


<클로버필드>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이름의 롤러코스터. 공포보다는 현기증.



이 중 올해의 영화 단 한 편을 꼽아보라면 <이스턴 프라미스>로 하겠습니다. 전작 <폭력의 역사>가 아버지의 액션에 더 이상 열광할 수 없는 이유였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그 액션이 어떻게 작동하고 또 유전되는지에 관한 탐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남자들의 계보’에서 누군가가 웃음의 코드를 주구장창 우려내는 동안, 크로넨버그는 이런 작품을 결국 내놓고 말았습니다. 뭐, 다른 영화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어떻게 소비시킬 것인가’와 ‘어떻게 읽힐 것인가’라는, 고민의 차이겠죠.


한편, 저의 2008년 최악의 영화는 <고사: 피의 중간고사>와 <울학교 이티> 정도입니다. 문제 제기를 해놓고는 결국 엉뚱한 짓만 해대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유의 영화들이거든요. 감당할 생각이 없다면, 애초에 그 지점으로 영화를 끌어다 놓지 않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 erazerh



2007년 영화 베스트 10

2006년 영화 베스트 10

2005년 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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