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有)


1. '언더테이커 vs 헌터'는 상당히 좋았다. 물론 역대 레슬매니아의 전설적 매치, 예컨대 WM13 브렛-오스틴, WM12 브렛-숀, WM11 브렛-오웬, WM20 벤와-숀-헌터 등에 비해 경기 질 자체가 돋보였던 건 아니다. 경기 시간에 비해 실제 무브먼트는 적었고 두 사람 다 힘에 겨워 헉헉대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거물 간의 격돌에서만 감지되곤 하는 팽팽한 공기, 그 밀도 높은 긴장감이 제대로 표현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다 하나씩 터지는 액션, 그 묵직함이란! 관록이란 바로 이런 거다. 헌터의 툼스톤 때는 정말 연승 끝나나 싶더라.

2. 언더테이커가 확실히 지쳐 보이긴 했다. 연출보다는 아무래도 실제상황에 조금 더 가깝지 않을까. 다음날 RAW에 아예 안 나온 것도 그렇고. 헌터는, 개인적으로 정말 몹시 싫어하는 선수지만, 경기 운영력과 연기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해머링과 스텀핑만으로도 명경기 제조가 가능한 몇몇 중 하나. 하긴 그렇게라도 해야지.

3. '에지 vs 델리오'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프닝, 월드 헤비급 타이틀전이 왜? 경기 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훨씬 더 많은 볼거리, 이슈를 남겼을 텐데 아쉽다. 앞으로 타이틀은 델리오한테 넘어가고 에지-크리스찬 간 대립이 있을 것도 같은데, 솔직히 크리스찬이라면 에지가 잡 좀 해주는 게 맞다.

4. 존 시나와 미즈, 둘 다 스스로 경기 흐름을 생성하는 능력은 아직 초보적인 선수들. 그런 둘을 레슬매니아 메인에 넣었으니 경기 질이야 뻔한 것 아닌가. 메인이벤트는 당연히 테이커-헌터여야 했으며, 굳이 타이틀전으로 치르려 했다면 에지-델리오 쪽이 차라리 나았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아 포효하는 엔딩을 왜 시합도 치르지 않은 락이 가져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괴하게 끝난데다 그 전부터 루즈하기 이를 데 없던 시나-미즈 전, 거기에 덧붙여진 락의 뜬금없고 이기적인 액션. WM9 호건 개입 이후 가장 눈꼴신 엔딩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날 RAW에서의 악수, 내년 레매 예약이라는 개그는 현 WWE가 표류 중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건 뭐 감성적인 사춘기 소년 소녀도 아니고, 싸우기가 그렇게 수줍어서야.

5. 존 시나,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 WWE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6. 현 WWE 풀타임 선수 중 최고는 누가 뭐래도 CM펑크다.

7. 신 카라가 RAW에서 데뷔했다(스맥에도 나왔다 한다). 개인적으로 하이 플라이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워낙 기대할 만한 선수가 없어서일까. 이 친구는 은근히 신뢰가 간다. 아! 아름다운 체공시간.

8. 브렛이 몇 주 전 자신의 트위터에 "내가 WWE에 악역으로 복귀한다면, 누구와 연합하고 또 누구와 대립하는 게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남긴 적이 있는데, 정말 돌아올지 어쩔지는 모르겠다. 딱히 그에게 어울리는 각본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온다면 하악.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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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월 13년 만에 링으로 돌아온 브렛 하트. 그의 컴백 스토리도 레슬매니아26 빈스전을 끝으로 사실상 마무리된 듯하다. 중간 중간 마음에 안 드는 각본도 있었고, 브렛의 과거만 못한 연기력에 세월무상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두 발로 걸어' 컴백했다는 자체가 경이로운 것인 바, 지난 1~4월은 레슬링 보는 재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쏠쏠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샤프슈터를 보지 않았나.

2. 약물 근육 덩어리들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메운, 90년대 뉴 제너레이션의 심장 브렛 하트, 그리고 라이벌 숀 마이클스. 업계 사상 최악의 악연으로 엮였던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은퇴전을 치렀다. 그것도 위 사진처럼 서로를 향해 웃고 또 격려하면서. 이런 장면을 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모쪼록 브렛이 97년 기억 따위 훌훌 떨치고 남은 삶 보다 여유롭게 대하길 바란다(물론 숀, 님은 그 기억들 쭉 가져가세요. 브렛이 어쨌건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겠지만).

3. 브렛이 몬트리올 스크류잡으로 WWE를 떠나던 그 즈음, 나는 군대에 갔다. 그러니까 브렛의 석연찮은 마무리는 내 소년시절의 끝 무렵, 불만과 불안으로 점철된 그 세기말적 시간대에 엉겨 붙어 어떤 아련한 恨처럼 기억되고는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브렛의 마지막 샤프슈터를 그토록 바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소원 성취. 프로레슬링이라는 '쇼'에서 '액션의 미학'을 발견케 해준, 내 소년시절의 히어로. 이제는 놓아드려도 될 것 같음. 잘 가세요.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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