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6세 소년이 있다. 그는 ‘파라노이드 파크’에 갔다가 그만 의도치 않게 한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 넣고 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이른바 사건 또는 사고. 이런 일들이 어떻게 주목의 대상으로 떠오르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나름의 논리를 간직한 이야기들이 사건을 서너 번 훑고는 확고부동한 기승전결을 내놓을 터. 아마도 그 대부분은 이번에도 별 다른 의심 없이 입을 모을 것이다. 소년은 정상적인 길에서 비껴간 불온한 영혼이었다고. 파라노이드 파크가 그런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일탈의 공간이라는 혐의를 덮어쓰게 될 것 또한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신속한 도출을 특징으로 하는 결론들은, 이처럼 내용면에서는 대개 진부하기 짝이 없다. 해당 현상 고유의 특성을 고려치 않은, 일종의 공식으로 굳어진 언어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탓이다. 폭력에 연루된 10대에게 잔인한 영화나 게임 따위의 낡고 낡은 수식어가 무조건 따라붙고 있음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규격화된 시선으로는 현상의 표면을 훑고 더듬고 또 필요에 따라 베어낼 수 있을지언정, 그 안쪽까지 어떻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저 깊은 곳, 조금 더 섬세한 눈길을 요하는 그곳은, 단지 하나의 공백이기 일쑤다.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의 관심은 주류 미디어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그 지점을 향한다. 그곳에서 구스 반 산트는 ‘사람을 죽인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한 영혼’으로서의 알렉스와 마주한다. 범죄에 연루됐음을 공표하는 데 쓰이곤 하는 수사적 3인칭 대신, 알렉스의 내면을 진술의 주체 자리에 불러 앉힌 셈이다. 그래서 <파라노이드 파크>에서는 주류 미디어의 범위에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를 만나는 게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사건의 내부로의 파장, 그리고 그것을 홀로 끌어안은 소년의 어떤 머뭇거림.


알렉스의 고립된 내면을 관객 앞으로 끌어내는 장치는 알렉스의 입이 아니라 역시나 ‘카메라’다. 구스 반 산트의 카메라는 현상으로부터 객관적인 상(像)을 추출하는 데는 여전히 관심이 없다. 최근의 몇몇 작품(특히 <라스트 데이즈>)과 마찬가지로, 그가 카메라에 담고자하는 것은 인물의 내적 갈등을 품은, 일종의 재구성된 외부 세계다. 내면의 흔들림이 투영된 낯선 세계상을 구상하고는 렌즈 앞에 놓인 사람과 사물들에서 그 느낌을 찾아내는 것. 따라서 <파라노이드 파크>의 카메라가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데 무관심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무관심 덕에, 곳곳에 스며든 알렉스의 영혼이 카메라에 감지될 확률은 더 높아진다. 예컨대 엄마와 삼촌의 얼굴이 프레임 바깥으로 철저하게 밀려나고 여자친구와의 첫 섹스가 무감각하게 치러지는 이유는, 그곳을 둥둥 떠다니는 알렉스의 절대적인 고독만이 카메라의 유일한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파라노이드 파크>의 카메라는 피사체 자체보다는 거기에 이입됐을 알렉스의 심경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는, 일종의 심리적 기계에 가깝다. 구스 반 산트는 이미 잘 알고 있었을 테다. 미디어의 언어가 다루지 않은 시공간을 이미지의 형태로 옮기는 데는, 감정을 읽을 줄 아는 이 영리한 기계만큼 유용한 게 없음을. 인과율의 적용이나 책임 규명이 없어도 좋을 알렉스만의 시공간, 사건의 내부적 층위는, 바로 그렇게 창조됐다.


물론 이는 알렉스에게 면죄부나 쥐어주고자 구축된 세계가 아니다. 구스 반 산트는 누군가를 재판하거나 끔찍한 결과 앞에 놓을 명백한 원인으로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도를 이번에도 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에게 여전히 중요한 것은 기승전결 구조 곳곳에 뚫린 ‘틈’이다. 현실에서 가공-유통되는 언어들로 포착 불가능한 어떤 세계가 그 틈 안에 놓여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알렉스는 바로 구스 반 산트의 그 믿음이 찾아낸, 공식화되기 이전의 존재인 셈. 따라서 알렉스의 행보에서 서사의 진행이나 사건에 관한 예측 가능한 경로를 읽으려는 노력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알렉스에게 실재란 오로지 죄책감과 불안과 고독이라는 제 안의 괴물일 뿐이며, 세상은 그 괴물에 빙의된 무능력한 공간 이상이 되지 못한다.

내면을 파고드는 사건의 후유증은 실제 삶을 압도할 만큼 이토록 강력하다. 알렉스가 현실적인 방향 감각을 잃고 자꾸만 머뭇거리는 것은, 그래서 필연에 가깝다. 하지만 갈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이 필연적 절망에도 끄트머리란 있기 마련이다. 그 작은 숨구멍의 존재를 알렉스가 감지할 때, 지독한 머뭇거림 이후의 ‘무엇’은 비로소 찾아온다. 그러니까 죄 지었음을 스스로에게 고백하기. 그럼으로써 진짜 삶으로의 복귀를 감내할 만한 내적 토대를 갖추는 것. 요컨대 여기에 이르기까지 지체된 시간, 즉 알렉스의 모든 ‘내적 독백’이 현실에 편입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구스 반 산트는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영화의 마지막, 프레임 바깥으로부터 알렉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그를 외부로 끌어내는 첫 공식적인 호명일 터. 이에 알렉스는 스케이트보딩의 추억을 떠올리며 오지 않을 미래를 마음속에 담아둔다. 동시에 모든 동작을 멈추는 카메라. 알렉스의 뇌를 탐험하는 일은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다시 추악하고도 화창한 날. 알렉스는 잘 견디고 있을까.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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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 감독, 그의 최고 걸작을 만들다


집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들어앉았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손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결국 어쩔 수 없이 코끼리와 함께 살며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해진다. 구스 반 산트는 미국의 고등학교를 서양우화에 나오는 코끼리에 비유한다.

영화 <엘리펀트(Elephant)>는 '어쩔 수 없는 코끼리'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의 16분을, 감정이입을 최대한 자제한 채 그야말로 '관조적'으로 뒤쫓는다.

영화 속 아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 대해 고민하며 눈물 흘리는가 하면, 학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이 낙인 녀석도 있다. 다이어트 중독에 걸린 세 명의 치어리더나 외모로 인해 고통 받는 여자아이 등 모두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의 그렇고 그런 삶의 모습이다.

심지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알렉스와 에릭조차 평범한 아이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따를 당하고, 게임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히틀러의 영상을 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런 상황을 살인의 동기로 단정 짓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누구나 총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하나의 ‘단서’이지 원인은 아니다.

영화는 비극과 그 직전의 ‘아무렇지도 않음’을 그저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나와 당신이 어디에서나 만나고 겪을 수 있는 이 아이들의 일상은 ‘추악하고도 화창한 어느 날’에 일그러진다.

같은 콜럼바인고교 사건을 다루었지만 마이클 무어와 구스 반 산트의 표현기법은 다르다.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분석하고 따져 묻는 반면, 구스 반 산트는 그저 아이들을 차분히 응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잘 짜여진 논설문 또는 거꾸로 읽는 미국사라면, <엘리펀트>는 건조체로 쓰여진 한 편의 시다.

숏들은 평범한 생활을 담담하게 담고, 절제된 카메라와 어우러져,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마치 ‘간직’하려는 듯이 각각의 시점에서 교차하고 반복된다. 구스 반 산트는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일상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야 했음에 주목한다. ‘왜 비극이 발생했는가?’라는 물음은 화면 밖에 남겨둔 채 말이다. 앙드레 바쟁이 살아있었다면 진정한 ‘창조적 다큐멘터리’라고 극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의 슬픈 연주는 롱테이크로 반복해보지만 결국은 비극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관객이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입구이다.

집안의 코끼리처럼 어쩌지 못한 채 함께 가야 할, 가끔은 터질 수도 있는 시한폭탄으로 자리 잡은 미국의 고등학교. 구스 반 산트는 한 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차분하면서도 슬픈 화법으로 재현함으로써,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된 그 광기의 순간을 고발하고 애도한다.

'월광소나타'가 그토록 슬프게 들리는 이유는, 미국의 코끼리 못지않은 어떤 무언가를 당신과 내가 짊어진 채 살아야 하는 비극 때문이 아닐까? 영화 안에서도 영화 밖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추악하고 화창하다. ⓒ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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