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영화의 매력은 단지 약자/강자라는 구도에 있지 않다. 그의 작품에는 이 구도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상징계와 실재계의 만남, 미끄러짐, 환기가 있다. 이는 (봉준호 영화 특유의) 부조리가 자연화된 관료적 위계에 포섭되지 않는 인물들 본연의 리듬을 통해 이뤄진다. 그들의 탈정치적 행보가 위로받아 마땅한 실재로 자리 잡을수록, 시스템의 비열한 구조가 점점 더 발가벗겨지는 식이다. 봉준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최종 숏, 즉 강렬한 환기의 이미지로 기어이 나아갔다.

 

반면 <설국열차>에서는 등장인물들의 경로가 명명백백하다. 윌포드를 끝장내고 엔진을 차지하는 것. 따라서 강자/약자로 이뤄진 착취 시스템은 훨씬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인물들은 그 위계에 역행만 함으로써 되레 시스템의 논리 안에 갇힌다. 순응이든 저항이든 행보 자체가 가지런히 정렬돼버린 셈이다. TV의 거짓에 분노하기는커녕 밥 먹는 데 방해된다며 무심하게 전원을 꺼버리던, 그 탈정치로의 출구가 이 열차 안에는 없다. 이를테면 재기 발랄한 시간의 부재.

 

봉준호는 어느 인터뷰를 통해 <설국열차>가 전작들과 전혀 다른 영화임을 밝힌 바 있다. 기차가 무대인만큼 '좌충우돌'보다는 '일방통행'의 형식을 택한 듯하다. 기존 작품들이 '오인'과 '미끄러짐'의 영화라면 <설국열차>는 '전진'(또는 전환)의 영화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전개가 (봉준호 치고는) 지나치게 평면적인데다 급하기까지 하다. 이미지가 비운 자리를 자꾸만 설명이 메운다. 그러다보니, 시스템 안에서의 혁명이 무의미하니 판을 갈아엎고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메시지조차 거대한 훈계처럼 들린다. ⓒ erazerh



* 송강호는 굳이 나올 필요가 있었나 싶고, 고아성은 연기를 못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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