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반, ‘백희혹은 배키로 불리는 소년이 같은 반 몇몇한테서 괴롭힘을 당한다. 그리고 다른 시점(時點), 누군가의 아버지가 아들의 과거 학교생활에 관해 수소문을 하고 있다. 무거운 낯빛으로 보아 아무래도 아들을 영영 잃어버린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 아버지는 백희의 아버지일까? 녀석은 자살이라도 한 것이고? 의문도 잠시, 영화는 이즈음 백희의 이름이 희준이고 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밝힌다. 곧이어 언급되는 기태라는 이름. 자살했으리라 짐작되는 아들은 기태, 희준을 괴롭히고 때리던 그 친구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년에 관한 낯익은 도식적 기표들이 있다. 성적비관, 왕따 등. 그런데 여기서는 친구들을 괴롭히던 이른바 싸움짱이 죽었다. 아마도 기표들은 나서기를 꺼릴 테다. 그것들에게 싸움짱은 자살을 하게 만드는 가해자이지 자살의 주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불우한 소년에 곧잘 붙는 기계적 수식어로 당최 설명되지 않는 상황, <파수꾼>(2011)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다. 이제 영화는 아이들이 어울려 놀던 한때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재가동한다. 플래시백은 단선적이지 않게 아버지의 현재 시제와 교차 편집되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 미스터리 구조만으로 작품이 신선한 파격까지 돋우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나의 스타일이 됐을 만큼 이미 두루 쓰인 플롯이기 때문.

대신 <파수꾼>에는 그 익숙함을 상쇄하거나 도리어 활용하는 장치, 요컨대 일상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긴장의 내러티브가 있다. 윤성현 감독은 발단전개는 괄호 쳐둔 채 의도적으로 위기의 에피소드를 반복, 친구 간 충돌이라는 흐름을 잘게 쪼개고 그 각각에 시간을 할애한다. 충돌 하나하나는 우리가 미리 알고 있는 결과를 경유해 도착하므로 그 울림은 배가된다. 자질구레하다고 흘려보내졌을 법한 소년들의 치기가 <파수꾼>에서는 거대해지는 까닭이다. “너네 눈빛 주고받았잖아?” “눈빛은 주고받았는데 비웃은 건 아냐.”라는 기태와 재호의 (사소한) 대화 숏에는 프레임의 면을 찢을 듯한 어떤 불안감이 팽배하다. 느와르 영화 속 뒷거리처럼 어둡고 냉혹한데다, 터지기 일보직전의 결국 터지게 될 폭력이 기저에 흐르기 때문이리라.

기태가 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에 가장 친했던 친구 동윤이 답한다.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 진심을 담은 의문이 비수로 돌아와 꽂히는 상황. 이에 관해 우리는 소년 간 충돌의 양상, 이를테면 불가능한 소통과 그에 따른 비극적 추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수꾼>에서 소년들의 발화는 서로 맞물리지 못한 채 각기 헛돌기 일쑤다. 이 불연속에 진의는 입 안에서 미끄러지고 욕설이 그것을 대체, 오해와 갈등을 겹겹이 쌓는다. 희준을 때린 것과 관련해 동윤이 왜 그랬냐?”고 따져 묻자 기태는 네가 뭘 아냐?”라며 받아친다. 각기 다른 의미작용(signification). 동일한 라인 위를 따로 돈다는 점에서 일종의 꼬리잡기 놀이다. 잡지 않으면 잡히는 게임, 소년들은 그렇게 폭력-폭언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궤도에 오른다. ‘잘못된 어딘가를 복기하고픈 기태의 마지막 소망은, 그러므로 조금 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

너만큼은 나한테 있어서 진짜.” “착각하지 마. 생각만 해도 역겨우니까.”라는 기태와 동윤의 대화에 이르러, 소년들은 사랑하므로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멜로드라마의 위악적 주인공으로까지 나아간다. 윤성현 감독은 기존 영화에서 장르적으로 소비되던 소위 노는 아이캐릭터를 폭력과 감성의 두 스펙트럼으로 분할, ‘여리고 민감한, 어린 마초라는 호응 불가능의 구절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요컨대 소년한테서 발견한 소녀성(). 물론 기태, 희준, 동윤은 (존 그레이가 말한) ‘금성같은 곳에서 온 남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 성질은 사춘기 여자아이 고유의 것이라기보다 상징계적 구분과 위계를 위해 사용되는 부정형의 기표에 가깝다. 소년들의 감춰졌던 속살, 그들의 또 다른 결은 이처럼 허락받지 못한 실재가 됨에 따라 위태로이 작동한다.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고 헤집으려 했던 우리는, 우리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단지 통감하는 데 급급할지도 모르겠다.

<파수꾼>의 도입부, 카메라는 무리지은 아이들을 흐릿한 초점으로 아무렇게나 프레임에 집어넣는다. 실패한 이미지는 마치 눈에 잘 들어오고, 이해하기 쉬우며, 놀랍지 않게 다듬어진 소년은 여기 없을 거라는 선언처럼 보인다. 마르틴 졸리의 말마따나 이미지는 실패하면 할수록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본질적인 눈먼 상태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파수꾼>은 이 눈멂이 추상화하는 장소, 이를테면 바람직하다고 제시되는 성장의 가이드라인 그 너머에 관한 환기다. 이는 프로파간다적 설파가 아니라 기태가 말한 설명 못 하는 것들로 수렴되는 문학적 현시를 통해 이뤄진다. 그래서일까. 홀든 콜필드만큼 세련되지 못했던,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로만 통행했던 아이들이, 애잔하다. eraze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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